', { cookie_domain: 'auto', cookie_flags: 'max-age=0;domain=.tistory.com', cookie_expires: 7 * 24 * 60 * 60 // 7 days, in seconds }); 티라노의 보물 :: '재미있는 영화세상' 카테고리의 글 목록 (2 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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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80년대 타잔 영화 론 엘리편, NBC 드라마, 사람과 사자의 싸움

 

 

 

 

 

70~80년대에 남녀노소할 것없이 안방 TV극장에 불러모았던 타잔영화를 기억하십니까? 정말 온갖 동물들이 다 나오는 흥미진진했던 모험영화였지요.

타잔이라는 매우 뛰어난 영웅이 아프리카 밀림속을 헤집고 다니면서 악당들을 물리치고 아프리카밀림의 질서를 잡아가는 타잔, 그리고 갖가지 신기한 야생동물들을 생생하게 구경할 수 있는 동물원보다도 더 박진감 넘치고 스릴감 넘치는 영화가 바로 타잔이랍니다.

 

 

타잔은 영화가 먼저 만들어졌으며. 영화 타잔이 크게 히트하자, ‘타잔을 드라마시리즈로 만들어서 TV로 연속방송하게 되었답니다. 그중에서도 70~80년에 우리 7080세대들이 보았던 타잔은 론 엘리가 주연으로 출연했던 타잔시리즈랍니다.

 

키가 193cm나 되는 거구에다가 온통 근육질의 단단한 체격을 가진, 헨섬하게 잘생긴 미국배우 론 엘리가 타잔으로 출연해서 멋지고 통쾌하게 악당들을 물리치는 타잔영화는 사람들의 혼을 쏙 빼놓을 정도로 흥미진진했으며. 박진감 넘치는 영화로 70,80년대에 가장 인기가 높았던 작품중 하나였지요.

 

  론 엘리 사진

 

론 엘리가 출연했던 타잔 시리즈는 원래 66년부터 68년도까지 미국 NBC TV방송국에서 시리즈물로 방송되었던 작품인데. 우리나라에는 70년대에 이르러 뒤늦게 방송되었으며. 론 엘리의 타잔영화가 큰 인기를 끌자, 80년대에 다시 리바이벌해서 방송되었답니다.

 

역대 타잔영화는 수없이 많이 만들어졌으며. 그 역사가 거의 100년을 이어오고 있을 정도로 타잔영화는 대중들의 높은 인기를 끌었던 장수영화이자 장수한 프로그램으로 명성이 높답니다.

타잔의 아버지라고 불리우는 유명한 배우 죠니 와이즈뮬러를 1대 타잔이라고 한다면, 론 엘리는 제6대 타잔이라고 할 수 있지요.

 

 

최초의 타잔영화는 1918년에 만들어진 타잔의 로맨스가 타잔영화의 효시라고 하며, 이때의 타잔영화는 무성영화로 만들어졌답니다. 에드가 라이스 버로우즈가 집필한 타잔소설을 원작으로 해서 시험적으로 만들어진 타잔영화가 예상밖의 큰 인기를 끌자, 허리우드제작자들은 앞다투어 타잔영화를 만들었으며. 최근까지 타잔영화는 총 40편이나 리메이크되어 만들어질 정도로 아주 장수한 영화작품이라고 합니다.

 

역대 리메이크한 작품중에서 40편이나 리메이크될 정도로 장수한 영화는 타잔 이외에는 없을 듯 싶습니다. 그만큼 타잔영화는 대중들에게 매우 큰 흥미를 가져다주었으며, 대중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할 정도로 야생의 신비로운 모험이야기를 담고있답니다.

 

6대 타잔으로서 우리에게 매우 친숙한 타잔의 주인공 론 엘리는 역대 수많은 타잔중에서도 가장 세련된 외모와 지성미 넘치는 타잔의 이미지를 보여주었기에 우리들에게 더욱 인상적인 배우로 기억되고 있답니다.

 

 

타잔영화가 큰 붐을 타기시작했던 30년대 타잔의 주인공 죠니 와이즈뮬러가 야성미 넘치는 감성적인 이미지의 타잔이었다면, 60년대 후반에 등장한 론 엘리는 가장 지성미 넘치는 타잔의 이미지를 구현해주었다고 할 수 있지요.

 

70,80년대 TV시리즈 타잔으로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느낌을 주는 론 엘리는 텍사스 대학원을 나온 고학력자이며, 태권도 무술유단자로서 실제로 타잔영화에서 뛰어난 발차기실력을 유감없이 선보여주어서 많은 남성관객들의 환호와 갈채를 받았었지요.

 

이미 이소룡영화가 나오기 5년 전인 60년대 후반에 타잔영화에 출연한 론 엘리는 멋진 이단옆차기를 타잔영화에서 선보여주어서 영화의 재미를 크게 배가시켜놓았답니다.

 

 

그리고 실전을 방불케하는 거대한 숫사자와 뒹굴면서 싸움을 벌이는 스펙터클한 모습을 보여주었던 론 엘리는 가장 고품격의 타잔의 이미지를 구현했던 베우로 유명합니다.

 

밀림속을 휘젖고 다니면서 온갖 약탈을 일삼는 탐욕한 악당무리들로부터 동물들과 약자들을 보호해주면서, 악당들에게는 인정사정없이 철퇴를 내리는 정의감 넘치는 타잔은 야생의 밀림속에서는 없어서는 안될 정의로운 협객이랍니다.

 

야생의 자연을 훼손하고 동물들을 함부로 살상하는 악당들을 하나둘씩 제거해나가고 자연의 질서를 바로 세우면서 밀림의 보안관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는 정의감 넘치는 멋진 타잔 론 엘리는 악인에게는 무섭고 추상같지만. 연약한 여성이나 약자에게는 한없이 부드럽고 너그러운 모습을 보여주는 우리가 본받아야할 신사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지요.

 

남자가 보아도 너무나도 멋지고 세련된 고품격의 타잔의 이미지를 보여준 론 엘리의 타잔영화를 한번 감상해볼까요?

 

 

 

론 엘리의 타잔영화 동영상 보기

 

 

 

 

 

 

 

 

론 엘리 이전의 타잔영화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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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한TV 서프라이즈' 681, 오드리 햅번과 줄리 앤드류스의 영화 ‘My Fair Lady’ 비화, 라이벌경쟁

 

 

 

 

196510월 미국 산타모니카 오디토리엄에서 열린 제37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오드리 헵번이 주연으로 출연한 마이페어 레이디가 최고의 작품상을 비롯해 8개의 상을 수상하는 쾌거를 이룬다.

 

세기적인 미녀 오드리 헵번 사진

 

하지만 자신이 주연으로 출연한 영화가 최우수 작품상을 수상했는데도 불구하고 오드리 헵번을 기뻐할 수가 없었다. 그 이유는 오드리 헵번이 출연한 당대 최고의 명작 마이페어 레이디에서 오드리 헵번은 노래대역을 썼다는 비난 때문이었다.

 

영화 마이페어 레이디는 길거리에서 꽃을 파는 빈민가의 여인 일라이자(오드리 햅번역)를 한 언어학자가 데려다가 언어교육과 교양교육을 시킨 뒤 상류층의 여성으로 만들어준다는 내용의 재미있는 뮤지컬영화이다.

 

마이페어 레이디는 원래 뉴욕 브로드웨이에서 7년 동안 무려 2,700번이나 뮤지컬로 상영되었던 인기 뮤지컬이 원작이었다.

그런데 뮤지컬로 먼저 만들어진 마이페어 레이디는 수년동안 줄리 앤드류스가 주연을 맡아 브로드웨이 무대에서 열연함으로써 마이페어 레이디의 흥행을 크게 올려놓았다.

 

 

이렇게 브로드웨이 연극무대에서 크게 사랑받던 뮤지컬 마이페어 레이디가 영화로 제작된다는 결정이 나왔을 때, 많은 사람들은 마이페어 레이디의 여주인공 일라이자역을 당연히 줄리 앤드류스가 맡을 것으로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제작자 잭 워너가 주인공 일라이자역으로 줄리 엔드류스가 아닌 오드리 헵번을 낙점했다. 제작자 잭 워너가 마이페어 레이디의 여주인공으로 오드리 헵번을 낙점한 이유는 당시 인지도가 떨어지는 줄리 앤드류스보다는 영화 로마의 휴일로 세계적인 인기를 끌고있던 오드리 헵번을 주인공으로 앉힘으로써 흥행몰이이 성공할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었고, 또한 잭 워너가 개인적으로 오드리 햅번의 열렬한 팬이었기 때문이었다.

 

60년대 허리우드영화계에서 라이벌구도를 형성했던 오드리 헵번(좌)과 줄리 엔드류스(우)

 

허지만 이러한 결정은 나중에 오드리 헵번과 줄리 앤드류스, 두 여배우의 운명을 엇갈리게 만드는 원인 되었다.

 

당시 줄리 엔드류스는 브로드웨이 연극가에서 가장 인기가 높았던 1인자였지만, 영화에는 한번도 출연한 경력이 없었으며 오직 연극에만 출연하고 있었기에, 제작자는 뮤지컬배우로 노래실력이 뛰어난 줄리 앤드류스를 인정을 하면서도, 종국에는 흥행성공을 보장할 수 있는 허리우드스타인 오드리 헵번을 주인공으로 발탁했던 것이다.

 

당시 마이페어 레이디는 제작 과정에서도 큰 논란이 불거졌다고 한다. 뮤지컬 마이페어 레이디에 수년간 출연해서 아름다운 목소리로 열연함으로써 뮤지컬 마이페어 레이디를 크게 성공시켰던 줄리 앤드류스가 1등공신으로서 당연히 영화 마이페어 레이디의 여주인공으로 발탁되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오드리 헵번이 높은 인지도와 백그라운드를 이용해서 쥴리 앤드류스의 여주인공자리를 빼앗아가 버렸다고 오드리 헵번을 맹비난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이같이 케스팅 논란이 크게 일자, 오드리 헵번은 영화 마이페어 레이디에서의 일라이자가 맡은 노래를 자신이 직접 부르겠다고 주장했다.

오드리 헵번은 노래실력도 없으면서 높은 인지도 때문에 발탁되었다고 하는 뭇사람들의 비난을 의식하고 그같은 우려를 불식시키기 위해서 주인공 일라이자가 부르는 여러곡의 노래들을 자신이 직접 부름으로써 논란을 잠재울 작정이었다.

 

그런데 제작자 잭 워너와 조지 큐거감독의 생각은 그녀의 생각과 달랐다. 오드리 헵번이 영화 티파니에서 아침을에서 잠깐 노래를 부른 적은 있지만, 영화 마이페어 레이디는 본격적인 뮤지컬영화이기 때문에 영화에서 수없이 노래하는 장면이 많이 반복될 뿐만 아니라,

최고수준의 노래실력을 필요로 했기 때문에 제작자와 감독은 오드리 햅번에게는 비밀로 한 채, 실제 영화에서는 오드리 헵번이 부른 노래를 뮤지컬배우인 마니 닉슨에게 노래더빙을 시켰던 것이다.

 

마니 닉슨은 뮤지컬배우로 영화 왕과나에서 데보라 카의 노래를 더빙하기도 했던 더빙전문 뮤지컬베우로 유명하다. 왠만한 뮤지컬영화는 그녀가 대부분 노래더빙을 했던 전력이 있다.

영화 마이페어 레이디를 촬영하던 막바지에 자신의 목소리 대신 다른 가수가 더빙을 했다는 사실을 알게된 오드리 헵번은 큰 충격을 받았고 촬영장을 이탈하기까지 했다.

 

 

오드리 헵번은 자신이 영화에서 실제로 노래를 부르는 데로 녹화가 될 것으로 알고 영화에 임했지만, 결국 제작자와 감독이 농간을 부려 오드리 헵번은 속고말았던 것이다.

이것은 나중에 오드리 헵번에게 엄청난 불명예를 안겨다 주었다. 실제 영화 마이페어 레이디에서 오드리 헵번의 목소리가 아닌 뮤지컬배우 마니 닉슨의 목소리가 나오자 오드리 헵번을 향한 비난여론이 들끓었다고 한다.

 

노래실력도 없으면서 단지 예쁜 얼굴과 높은 인지도 때문에 마이페어 레이디에 발탁되었다고 비난하면서 오드리 헵번에게 주인공자리를 빼앗겼던 줄리 앤드류스를 크게 동정하는 분위기가 높아졌다.

 

 

그리고 오드리 헵번은 마이페어 레이디에서 뛰어난 수준급 연기를 선보였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직접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자신이 출연한 영화는 최우수작품상을 받았는데도 불구하고, 여주인공인 그녀는 여우주연상을 수상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노미네이트되지도 못하는 개망신을 당하고 말았다.

 

영화 마이페어 레이디1965년 한해동안 전세계를 뒤흔들 정도로 엄청난 화제와 인기를 끌었으며, 37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총 8개의 상을 휩쓸어버렸다.

또한 영화 마이페어 레이디는 개봉된 후 무려 7200만 달러라는 엄청난 흥행수익을 올려 흥행에도 대성공을 거두었다. 우리나라 돈으로 840억원이나 되는 어마어마한 흥행수익을 거둔 것이다.

 

그럼에도 영화 마이페어 레이디의 흥행에 1등 공신 역할을 했던 오드리 헵번은 아카데미상 수상은 커녕 노래대역 논란으로 망신만 톡톡히 당하며 큰 곤욕을 치렀을 뿐이었다. 영화 마이페어 레이디의 여주인공 오드리 헵번은 이 영화로 마음의 상처를 크게 받았다고 한다.

 

 

오드리 헵번은 자신이 직접 부른 노래가 정작 영화에서는 다른 뮤지컬배우의 목소리로 뒤바꾸어버렸고, 온몸을 내던져서 열연했는데도 불구하고 오히려 비난만 쏟아졌으며, 더욱이 줄리 앤드류스의 배역을 빼앗아 버렸다는 항간의 비아냥에 때문에 마음고생을 심하게 했다고 한다.

 

한편 뜻하지 않게도 오드리 헵번으로 인해서 영화 마이페어 레이디에 출연하지 못하게 된 줄리 엔드류스는 다른 뮤지컬영화에 출연하게 되었는데, 바로 메리포핀스라는 영화였다.

 

 

마술사인 줄리 앤드류스가 한가정에 어린아이들을 돌보는 보모로 들어가 개구쟁이 아이들을 돌보면서 벌어지는 신나는 모험이야기로 생애 첫영화에 출연한 줄리 앤드류스는 영화 메리포핀스에서 뛰어난 가창력과 출중한 연기력을 선보여서 평론가들의 극찬을 받았으며, ‘메리포핀스는 흥행에도 대성공을 거두게 된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줄리 앤드류스가 출연한 영화 메리포핀스는 자신이 탈락했던 영화 마이페어 레이디의 흥행을 앞서가는 이변을 일으켰던 것이며,

이 영화에서 눈부신 연기를 선보인 줄리 앤드류스는 제37회 아카데미 사상식에서 오드리 헵번을 앞지르고 최우수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는 쾌거까지 이루어냈으니, 정말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영화 메리포핀스의 대성공으로 줄리 앤드류스는 허리우드 톱스타의 반열에 오르며 이후 흥행가도를 달리게 된다.

영화 마이페어 레이디이후 인기가 점점 하락해가는 오드리 헵번과 달리 줄리 앤드류스는 영화 메리포핀스이후, ‘사운드오브 뮤직’ ‘밀애등 수많은 명작품들에 출연하면서 높은 인기가 명성을 이어나갔으니, 영화 마이페어 레이디를 계기로 오드리 헵번과 줄리 앤드류스는 서로 엇갈린 운명을 살아가게 된 것이다.

 

뮤지컬계의 명작품인 마이페어 레이디에 화려하게 스카웃되었던 오드리 헵번은 마이페어 레이디로 인해서 엄청난 상처와 인기의 하락을 걲게되는 신세로 전락했으며, ‘마이페어 레이디캐스팅에 탈락한 줄리 앤드류스는 그 이후 오히려 승승장구하면서 오드리 헵번 이후의 최고의 허리우드스타로 거듭나게 된 것이다.

 

 

오드리 헵번이 마이페어 레이디를 촬영한 지 1년 뒤에 그녀는 유명영화사로부터 또다른 뮤지컬영화에 출연을 제안 받는다.

그런데 오드리 헵번은 영화 마이페어 레이디의 후유증과 상처가 너무 심해서 또다른 뮤지컬영화에 출연을 거절했다고 하는데. 오드리 헵번이 출연을 거절한 영화는 그 유명한 사운드 오브 뮤직이었으며, 오드리 헵번 대신 대타로 사운드 오브 뮤직에 출연한 배우는 바로 줄리 앤드류스였다.

 

쥴리 앤드류스는 1965년도 뮤지컬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에서 아무도 해낼 수 없는 아주 훌륭한 연기를 선보였으며, 줄리 앤드류스는 청순한 연기와 출중한 노래로 전세계의 관객들의 엄청난 환호와 갈채를 받았다.

 

  메리 포핀스의 줄리 앤드류스

 

이번에는 반대의 입장이 되어 오드리 헵번 대신 줄리 앤드류스가 출연한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은 제38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최우수 작품상을 수상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정말 오드리 헵번과 줄리 앤드류스는 마치 라이벌처럼 너무나도 자주 엮이게 되었고, 두사람이 함께 거명되었던 영화에서 최종적인 승자는 줄리 앤드류스로 귀결된 것이다.

 

오드리 헵번은 자신의 뜻과는 상관없이 줄리 앤드류스에게 탈락의 아픔을 준 것을 잊지 않고 있었으며, 오드리 헵번은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줄리 앤드류스를 직접 찾아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축하의 인사를 해주었고 두여배우는 다정하게 포즈를 취하며 아름다운 화해를 나누었다고 한다.

사실 오드리 헵번이나 줄리 앤드류스 두사람은 영화 때문에 외형적으로는 갈등을 빚는 것처럼 보였지만, 듀사람은 전혀 악감정도, 갈등도 없었다.

 

  아카데미시상식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줄리 엔드류스(우)를 축하해주는 오드리 헵번(좌)

 

단지, 돈을 버는 데에는 혈안이 되었던 허리우드의 영화 제작자들이 농간을 부리고 술수를 부려서 서로 아무 감정도 없던 두 여배우들을 갈등의 길목으로 내몰았던 것일 뿐이다.

 

사실 오드리 헵번은 영화 마이페어 레이디에 출연한 것은 사실이지만, 여론몰이로 인해서 마음고생을 심하게 했고, 줄리 앤드류스 못지않은 피해자의 한사람이다.

천사 같은 고운 마음씨를 지닌 오드리 헵번이 영화제작자들의 농간 때문에, 마치 쥴리 앤드류스의 권리를 빼앗가버린 욕심쟁이처럼 내비치는 것은 결코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다.

 

  '마이페어 레이디'에서 열연하고 있는 오드리 헵번

 

오드리 헵번은 분명 영화 마이페어 레이디에 출연제의를 받았을 때부터 더빙없이 자신이 직접 노래를 부르겠다고 강한 의욕을 보였고, 혼신의 힘을 다해서 마이페어 레이디를 성공작으로 만들었다.

그런 그녀의 진면목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단지, 결과와 외형만을 보고서 오드리 헵번에게 비난을 퍼붓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오드리 헵번은 잘못한 것도 전혀 없었지만, 욕심많은 영화제작자와 농간과 특종을 터트리기 좋아하는 미국 언론매채들의 잘못된 관행 때문에 희생양이 된 것이다

오드리 헵번과 줄리 앤드류스 모두 60년대를 활짝 빛낸 뛰어난 미모와 연기력을 갖춘 전설적인 명배우들이다.

 

특히 오드리 헵번은 해마다 실시하는 세기적인 미인 앙케이트조사에서 항상 2위권을 유지할 정도로 뛰어난 미모로 전세계에 많은 팬들을 보유하고 있는 전설적인 슈퍼스타다.

 

 

또한 오드리 헵번은 얼굴만 예쁜 것이 아니라, 마음씨도 비단결처럼 아름다워서 사망하기 전 오랫동안 아프리카의 굶주림에 시달리는 빈곤한 아동들을 돌보아주는 등 그녀의 착한 선행은 그녀의 외모의 아름다움보다 더 큰 아름다움으로 느껴질 정도이다.

아프리카의 굶주린 아이들을 위해 헌신적인 봉사활동으로 사랑과 헌신을 몸으로 실천해보여주었던 세상에서 마음씨가 가장 아름다웠던 오드리 헵번!

 

60년대 줄리 앤드류스와 마치 라이벌구도를 형성했던 것처럼 비치는 것은 특종잡기를 주업으로 하는 언론에서 만들어낸 것일 뿐이며, 오드리 헵번은 그 누구도 의식하지 않고 영화 '마이페어 레이디'에서 혼신의 힘을 다해 연기함으로써, '마이페어 레이디'를 최고의 영화로 만들어냈던 1등공신이다.

 

이렇게 '마이페어 레이디'를 역대 최고의 걸작중 하나로 만드는데 큰 기여를 했던 오드리 헵번이 마치 줄리 앤드류스의 배역을 뺏어간 것처럼 알려진 것은 오드리 헵번 자신에세도 매우 억울한 일이며, 오드리 헵번도 제작자의 농간으로 상처를 많이 받았던 피해자일 뿐이었다.

영화 '마이페어 페이디'의 오드리 헵번의 노래더빙 논란으로 인해서 평생 사랑과 헌신을 실천하면서 살다간 얼굴과 마음씨가  모두 아름다운 최고의 여배우 오드리 헵번의 명예에 누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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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리우드 최고의 미녀여배우 그레이스 켈리의 영화와 사망이유, 음모설

 

 

 

 

50년대에 활동했던 허리우드의 여배우중에서 가장 화려한 족적을 남겼던 배우를 꼽자면 단연 그레이스 켈리를 꼽을 수 있다.

그레이스 켈리는 허리웃 여배우중 가장 아름다운 미녀여배우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닐 정도로 그녀의 눈부신 미모는 그녀가 사망한 지 30년 더 지난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의 입에서 회자되고 있을 만큼 대단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다.

 

 

그레이스 켈리가 활동했던 50년대에 수많은 여배우들이 미모와 연기력을 뽐내며 허리우드에서 활동했는데, 마릴린 몬로, 에바 가드너, 리즈 테일러, 오드리 헵번, 데보라 카 등 수많은 쟁쟁한 여배우들이 있었지만, 미모 한가지로만 판단하자면 가장 완벽한 미모를 지닌 여배우는 단연 그레이스 켈리를 꼽을 수가 있다.

그레이스 켈리의 미모는 다른 여배우들과 달리 아무리 오래 보아도 질리지가 않고 이목구비가 너무 완벽해 보면 볼수록 그녀에게 한없이 빨려들어가게 된다.

 

청순하면서도 우아하고 이지적이면서도 극히 여성스러운 가련한 미모를 지니고 있는 그레이스 켈리는 신이 빗어놓은 가장 아름다운 피조물이라고 해도 지나침이 없을 정도다.

 

 

자신의 이름만큼이나 아름다웠던 그레이스 켈리는 1951년도부터 56년까지 뛰어난 명작품들에 출연해서 그녀의 눈부신 미모와 알찬 연기력을 선보여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감명을 안겨주었는데, 56년 모나코의 레니에 왕과 전격 결혼해 허리우드를 떠나면서 세계의 수많은 팬들에게 안타까움과 아쉬움을 남겼다.

 

이렇게까지 아름다운 세기적인 미녀여배우가 이렇게 빨리 영화계에서 은퇴한 것을 많은 사람들이 안타깝게 생각했는데, 그 이유는 그녀가 출연했던 영화들을 보면 충분히 알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녀가 얼마나 아름다웠으며 그녀의 연기력이 얼마나 탁월했는지를!

 

허리우드에서 인기 좋고 유명한 여배우로 그레이스 켈리가 단연 톱인데 그레이스 켈리가 영화배우로 활동했던 기간은 고작 5년에 불과할 정도로 짧다.

그레이스 켈리는 1951년도에 영화 ‘14시간으로 데뷔했으며 하이눈’ ‘모감보’ ‘이창’ ‘나는 결백하다’ ‘다이얼M을 돌려라’ ‘갈채’ ‘백조등 총 11편의 영화에 출연했는데 그녀가 출연했던 영화들은 모두 걸작품들로 흥행에 크게 성공을 거둔다.

 

 

그레이스 켈리는 영화 갈채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을 정도로 그녀의 연기력은 그녀의 아름다운 미모와 더불어 전세계인들에게 진한 감동과 환희를 주기에 충분했을 정도로 그녀는 타고난 천생 연기자였다.

 

그레이스 켈리는 5년이라는 매우 짧은 기간동안 영화배우로 활동했을 뿐이지만, 그녀가 영화계에 남겼던 족적은 너무나도 큰 것이었으며 그녀가 남긴 10여편의 영화들은 모두가 한결같은 걸작품들로 수많은 올드팬들에게 영원히 잊혀지지않는 추억의 한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다.

 

그레이스 켈리는 영화배우로써 전성기를 누릴 무렵 모나코의 왕 레니에로부터 12캐럿짜리 다이아몬드반지와 함께 프로포즈를 받았고 1956년 레니에와 결혼함으로써 허리우드와 작별을 고하게 된다

미국 헐리우드사는 100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하는 보석같은 여배우를 잃게되었고 모나코는 세계최고의 미녀여배우를 왕비로 얻음으로써 세계적인 부국으로 발돋움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얻는다.

 

 

그레이스 켈리가 모나코의 레니에왕과 결혼한 후 그레이스 켈리의 높은 인지도를 이용해 엄청난 관광특수를 누리며 세계의 수많은 부호들을 끌여들일 수 있었고 세계에서 2번째로 작은 나라 모나코는 세계적인 부국으로 급성장할 수 있었다.

 

 

그레이스 켈리가 모나코의 레니에왕과 결혼한 것에 대해서 일각에서는 음모설이 제기되고 있는데 유럽의 약소국이었던 모나코는 심한 재정적 위기를 맞고있었으며 프랑스와의 조약에 의해서 합병될 위기도 맞고 있었는데, 이러한 국내외적인 위기에서 극복하기 위해 모나코왕실이 계획적으로 허리우드의 미녀여배우를 왕비로 앉혔다는 것이다.

 

 

지중해의 작은 약소국이었던 모나코는 심한 재정적 위기를 겪고 있었는데 그레이스 켈리가 모나코왕과 결혼한 후 모나코에 대한 인지도는 급상승하였고 수많은 관광객들이 모나코로 몰려들면서 엄청난 관광특수를 누리게 되었으며 프랑스와의 합병으로부터도 벗어나 완전 독립국으로 성장할 수 있게 되었으니

그레이스 켈리 효과를 톡톡히 보았던 것이다. 이러한 현상을 두고 일각에서는 그레이스 켈리는 단지 모나코의 회생을 위한 정략결혼의 희생자였을 뿐이라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또한 그레이스 켈리의 죽음과 그 사망원인에 대해서도 수많은 의혹들이 제기되고 있는 상황이다. 그레이스 켈리는 여름별장에서 왕궁으로 돌아가는 상황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했는데 함께 타고있던 스테파니공주는 무사했다.

 

 

그레이스 켈리는 레니에왕과 결혼한 후 케롤라인, 스테파니. 그리고 현재 국왕이 된 알버트 2세등 세명의 자식을 낳았고 겉으로는 화려하고 행복해 보였지만, 그녀는 평생을 허리우드를 그리워하면서 살았다고 한다.

미국 허리우드를 그리워하면서 왕궁의 답답한 생활에 적응하지 못한 그녀는 매일 술을 마시면서 살았으며 마침내 알콜중독 신세에 빠지고 여러 남성들과 숱한 염문을 뿌리기도 했다고 알려지고 있다.

 

 

그녀가 모나코의 홍보대사로서의 품위를 잃어버리고 모나코의 이미지가 하락하게 되자, 모나코왕실은 더 이상 효용가치를 상실한 그녀를 교통사고로 위장해서 숨지게 했다고 하는 음모설이 제기되고 있는 상황이다. 마치 영국의 황태자비인 다이애나의 죽음과도 닮은 점이 많이 있다.

 

1982년 그레이스 켈리는 별장에서 왕궁으로 돌아가는 도중 자신이 운전했던 자동차가 갑자기 도로옆 절벽밑으로 추락하는 사고를 당해 52세의 젊은 나이에 사망하고 만다.

 

 

영국작가 로버트 레이시는 그레이스 켈리가 자동차사고를 당한 후 장시간 방치되었다는 점, 그리고 사고현장의 자동차나 유품들을 곧바로 치워버려 증거를 남기지 않았다는 점, 같은 자동차에 탑승했던 스테파니공주만 살아남고 

그레이스 켈리만 사망했다는 점 등을 들어 사고사가 아니라 모나코왕실에서 사전 기획된 시나리오에 의해서 그녀가 사망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그레이스 켈리의 사망에 대한 음모설이 나오자 모나코왕실은 그녀가 사망했을 때 함께 차에 타고있었던 스테파니공주를 내세워 그레이스 켈리가 뇌졸중을 앓고 있었고 교통사고는 술을 먹은 상태에서 운전했던 그레이스 켈리의 운전 부주의 때문에 발생했다고 해명한 바가 있지만, 아직까지도 그레이스 켈리의 사망과 관련한 논쟁은 가열되어 나갈 뿐 사그라들지 않고 있다.

 

그렇지만 그레이스 켈리가 사망하기 전에 우울증과 심한 알콜중독에 걸린 것은 사실인 것으로 판명되었으며 그녀가 문란한 사생활에 빠져 있었다는 것도 어느정도는 사실인 것 같다.

 

 

또한 이와관련해서 그레이스 켈리의 남성편력이 수면위로 올라오고 있어서 그레이스 켈리를 흠모하고 있는 수많은 팬들의 가슴을 안타깝게 만들고 있다일각에서 제기되는 주장처럼 과연 그레이스 켈리의 남성편력이 그토록 심했으며 문란했던 것인가?

 

그레이스 켈 리가 교통사고로 사망한지, 12년후인 1994년 영국작가 로버트 레이시는 그레이스라는 책을 출판하고 베일에 감춰져있었던 그레이스 켈리의 문란했던 사생활과 남성편력을 낱낱이 폭로하고 나섰다.

 

로버트 레이시가 쓴 이책에서는 그레이스 켈리의 어머니와 가족들, 친구와 목격자들의 생생한 증언을 토대로 그녀의 숱한 남성편력들이 적나라하게 전개되고 있어 엄청난 충격을 안겨주고 있다.

 

 

수많은 남성들의 로망의 대상이었던 그레이스 켈리는 실제생활에서는 오히려 수많은 남성들을 도발했던 요염한 요부 같은 존재로 묘사되고 있다.

 

깨끗하고 이지적인 그녀의 용모와는 다르게 그레이스 켈리는 생전에 여러남자들과 염문을 뿌리고 다녔으며 이러한 사실은 그 당사자들의 생생한 증언과 목격담에 의해서 사실로 확인되고 있다는 점이 정말 놀라울 뿐이다.

 

그녀를 등용한 엘트레드 히치콕감독은 그레이스 켈리를 차가운 눈속에 덮힌 뜨거운 활화산이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이것은 겉으로는 이지적이면서 차가운 인상을 주고있는 그레이스 켈리이지만 속으로는 엄청나게 뜨거운 욕망을 간직하고 있는 여자로, 화산처럼 한번 분출되어 치솟아버리면 결코 겉잡을 수 없을 만큼 모든 것을 태워버릴 정도로 그녀의 욕망은 아주 뜨겁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그레이스 켈 리는 18세때 뉴욕의 연극아카데미교사인 돈 리처드슨과 연극여행중 야전침대에서 자연스럽게 관계를 가졌다고 하며 그후 돈 리처드슨과 4년간이나 교제를 해왔다고 하며, 또한 그녀는 17세때 연극학교 친구 알렉상드르 다르시와 빈번히 관계를 가졌다고 한다.

 

 

그레이스 켈리와 실제로 사귄 경험이 있는 돈 리처드슨과 알렉상드르 다르시가 증언한 내용인데, 겉으로는 도도해보이면서 절제된 인상을 주는 그레이스 켈리는 남자의 손이 자신의 무릎에 닿기만해도 바로 남자의 품에 안겨버리는 그런 여자라고 술회하고 있어서 너무나도 충격적이기까지 하다.

그렇다면 그레이스 켈리는 정숙하고 이지적인 여성이 아니라 보통 여자들보다도 더한 요부라고 할 수 있다.

 

영국작가 로버트 레이시가 수년간 조사한 바에 따르면 놀랍게도 그레이스 켈리는 자신이 출연했던 영화의 상대 남성배우들 대부분과 관계를 가졌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 유명한 게리 쿠퍼, 클라크 게이블, 레이 밀러드등 당시 함께 출연했던 주연남성배우들과 거리낌없이 관계를 가졌다고 한다.

 

그레이스 켈 리가 최초로 출연했던 52년도 허리웃영화 하이눈의 주연배우 게리 쿠퍼와 깊은 관계를 가졌는데, 이당시 그레이스 켈리는 23, 게리 쿠퍼는 51세로 부녀지간의 나이차이에도 불구하고 그레이스 켈리는 대담하게도 게리 쿠퍼를 도발했던 것이다.

 

또한 53년도의 허리웃영화 모감보에서 함께 출연했던 남성배우 클라크 게이블과도 염문을 뿌렸는데 그당시 클라크 게이블은 51, 그레이스 켈리는 24살 로 역시 부녀지간의 나이차이가 나고 있다.

 

 

54'다이얼 M을 돌려라에서 함께 출연했던 레이 밀런드와도 깊은 관계를 가졌으며 유부남이었던 그와 동거생활에 착수하지만 그레이스 켈리 집안의 극심한 반대에 부딪쳐 무산되었다고 한다. 그레이스 켈리와의 애정행각이 발각되어서 레이 밀런드는 부인과 별거에 들어갔을 정도라고 한다.

 

그레이스 켈리는 마음껏 바람을 피웠다고 하지만 결혼만큼은 신중을 기했다고 한다. 유서깊은 그녀집안의 엄격한 전통 때문이 아니었을까?

또한 그녀의 소속사인 MGM영화사에서 그레이스 켈리의 이미지 훼손을 막기 위해서 그레이스 켈리의 스켄들을 비밀에 부치고, 주변사람들의 입단속을 시키는등 그녀의 이미지관리를 철저하게 진행해서 그레이스 켈리의 스캔들은 그당시 수면아래로 가라앉힐 수 있게 됐다.

 

54년도엔 그녀에게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의 영광을 안겨주었던 영화 갈채에 함께 출연한 남자배우 빙 크로스비와 또다시 깊은 관계에 빠지게 되며 그레이스 켈리는 빙 크로스비와 결혼에 대해 부모의 승낙까지 받았다고 하는데 윌리엄 홀덴과의 만남 때문에 마음이 변심해서 결혼은 무산되었다고 하며, 그대신 영화 도곡리 다리에 함께 출연한 윌리엄 홀덴과 깊은 정사를 나누었다고 한다.

 

 

그레이스 켈리의 이러한 염문행각은 55년도에 출연한 영화 나는 결백하다를 촬영하기 위해 찾아간 프랑스의 리비에라해변 촬영으로 멈추게 되는 계기를 마련한다

그레이스 켈리가 리비에라해변에서 나는 결백하다를 촬영하는 도중 가까운 곳에 있었던 모나코의 레니에왕의 초대장을 받았으며, 모나코왕궁에 초대받은 그레이스 켈리는 레이니에왕으로부터 12캐럿의 다이아반지를 함께 프로포즈를 받게되었고

그 이듬해인 56년도에 레니에왕과 결혼함으로써 그녀의 스캔들은 수면아래로 감춰질 수 있게 되었다.

 

그레이스 켈리가 모나코의 왕비가 되었다고 해서 그녀의 염문행각이 중단된 것은 아니라고 한다. 세자녀를 낳고 중년여인이된 그레이스 켈리는 여전히 눈부신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었는데, 세월이 지날수록 남편 레이니왕과는 사이가 멀어지고 불화가 생겼다고 한다.

 

그레이스 켈리는 원래 자유분방한 생활을 즐기던 스타일이었는데 결혼후 엄격한 법도를 강조하는 왕궁생활에서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았다고 하며 그녀는 허리웃시절에 대한 그리움과 왕궁생활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잊기위해 파티에서 만난 몇몇 젊은 남성들과도 염문을 뿌렸다고 한다.

 

그레이스 켈리가 사망하기 직전에도 16세 연하의 젊은 남성과 깊은 관계를 지속하고 있었다고 하니, 그녀의 바람기는 선천적으로 타고난 성향이 아닐까 느껴질 정도이다. 이로 인해서 그레이스 켈리와 레이니에왕과의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다고 하며 그녀가 82년 자동차사고로 사망하게 되자, 음모설이 나오게 되는 계기로 작용한다.

 

 

세계인의 사랑과 축복을 받으며 동화속 공주같은 화려한 삶을 살다갔지만 그레이스 켈리의 죽음은 너무나도 비극적인 것이었다.

 

198252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그레이스 켈리는 모나코의 왕비가 되지않고 차라리 은막의 여왕으로 남는 편이 더 좋았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야 전세계의 수많은 팬들이 그녀의 아름다운 모습이 담긴 더많은 걸작품을 감상하는 행복감을 누릴 수 있고, 그녀 자신도 자신의 성향에 맞는 자유롭고 활기찬 생활을 해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세계 왕족중에 가장 아름다운 왕비라는 칭호가 부여되고 역대 영화배우중에서 가장 우아한 미녀라는 타이틀을 받았던 그레이스 켈리의 숨겨져왔던 문란한 사생활과 화려한 남성편력이 알려짐으로써 그레이스 캘리의 고상하고 깨끗한 이미지에 큰 손상을 받게 되었지만, 그녀의 사생활은 그냥 묻어두는 것이 더 좋을 듯싶다

우리는 영화배우로서의 그레이스 켈리를 사랑했던 것이지, 그녀의 은밀한 사생활을 사랑했던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레이스 켈리가 생전에 살았던 모나코의 왕궁

 

그냥 그녀가 아름다운 미모를 지닌 영화배우서만 기억하고 싶을 뿐이며, 그녀가 출연한 훌륭한 걸작품들을 감상하는 것에 만족하고 싶다. 그녀도 자신의 사랑을 마음껏 누릴 자유가 있는 것이며 그녀가 단지 전시관속에 전시된 예쁜 밀랍인형은 아닌 것이다.

그레이스 켈리에 대해 그녀의 염문행각을 거론하면서 판단할 것이 아니라, 그녀가 출연했던 수많은 걸작품들의 품질이나 완성도를 논하고 관심을 갖도록 하자!

 

그레이스 켈리를 모나코의 왕비로서 보다는 50년대를 가장 빛낸 허리웃여배우로서 기억하고 싶은 것이 필자의 바램이다.

언제 기회가 있으면 영화 모감보’ ‘하이눈’ ‘도곡리 다리를 감상보시길 바란다. 그녀의 아름다운 미모 뿐만 아니라 그녀의 명품연기가 얼마나 대단한가를!

 

 

그레이스 켈리, 케리 그란트 주연의 나는 결백하다영화 숏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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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프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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