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cookie_domain: 'auto', cookie_flags: 'max-age=0;domain=.tistory.com', cookie_expires: 7 * 24 * 60 * 60 // 7 days, in seconds }); 티라노의 보물 :: '한국무술영화 & 고전한국영화' 카테고리의 글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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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동적인 한국영화 추천) 왕호의 황정리의 70년대 한국무술영화 흑룡강내용

 

 

무술영화의 대가 김선경감독의 76년도 작품으로 흑룡강은 중국 쿵푸짝퉁영화가 아닌 순수한 토종 한국무술영화라는 데에 의미가 있다.

당시 태권도 사범이었던 왕호를 영화배우로 데뷔시켰던 작품으로 왕호의 화려한 발차기솜씨가 빛을 발휘했던 왕호의 데뷔작품이다.

 

 70년대 중반 최고의 무술스타로서 한국무술영화를 주도해 나갔던 왕호(좌)와 황정리(우) 

 

왕호는 이 흑룡강밀명객을 찍어서 많은 국내외팬들에게 태권도의 실력자로서 깊은 인상을 심어주는데, 특히 이영화를 본 홍콩감독이 왕호의 발차기실력을 높이 평가하고 홍콩으로 왕호를 진출시키는 데에 계기가 되었떤 작품이다.

무술영화의 메카나 다름없었던 홍콩의 골든하베스트사의 홍금보감독이 흑룡강에서 뛰어난 발차기액션을 선보인 왕호에게 매료되어 그를 홍콩의 골든하베스트로 스카웃했고 이후 왕호는 홍콩에서 수많은 무술액션영화에 출연함으로써 국제무술스타로 급부상하게 된다.

 

 

그런데 영화 흑룡강에 함께 출연해서 왕호와 숙명의 대결을 펼쳤던 액션배우가 바로 황정리라는 사실이다당시 테권도 고단자였던 황정리는 이영화에서 황태수라는 이름으로 데뷔하였는데 나중에 중국에 진출하고 난후 이름을 황정리라고 바꿔서 활동한다.

 

황정리도 홍콩진출에 성공하는데 홍콩에서 취권’ ‘사형도수등 최고의 흥행을 달성하였던 영화들에 출연하여 발차기의 달인이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눈부신 발차기액션을 선보이면서 대단한 활약을 펼친 바 있다.

 

 

왕호 또한 비슷한 시기에 홍콩에 진출하여 중원호객’ ‘북소림 남태권등에 출연하면서 연발차기의 명수, 가위차기의 명수라는 닉네임을 얻을 정도로 그의 발차기실력을 공인받으면서 큰 활약을 펼쳐보였다.

 

영화 흑룡강은 무술영화의 붐이 크게 일어났던 76년도에 제작된 영화로서 김용호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던 왕호의 첫 데뷔작이다.

황정리는 왕호보다 2년 앞선 74년에 데뷔했는데 당시 화려한 발차기로 큰 인기를 끌었던 한용철 주연의 영화 돌아온 외다리에서 처음으로 데뷔했는데 황태수라는 이름으로 출연한 황정리는 영화 돌아온 외다리에서 출연해서 한용철과 태권도실력을 겨루는 등 인상적인 연기를 펼쳤지만 단역으로 출연했다는 아쉬움을 남겼다.

 

 

 

 

영화 흑룡강줄거리

 

만주에서 한인들을 상대로 무술도장을 운영하고 있는 박상봉은 친구의 아들인 거암(왕호역)에게는 무술을 가르쳐주지 않는다. 먼발치에서 무술을 연마하는 다른 친구들을 부러워했던 주인공 거암(왕호역)은 스승에게 무술을 전수해줄 것을 간청하지만 친구가 유언으로 남긴 친구의 유지를 지켜주기 위해 스승 박상봉은 거암에게 만큼은 무술을 허락하지 않았다.

 

자신에게 무술을 가르쳐주지 않는 스승을 원망하며 거암은 스승의 곁을 떠나가게 된다. 그리고 일본인 가라데명인에게 귀의해서 무술을 배우게 된 거암은 피눈물나는 훈련 끝에 최고의 무도가로 거듭나게 된다.

일본인스승을 모시는 거암은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자신이 일본야쿠자의 앞잡이노릇을 하게되면서 정체성에 큰 혼란을 느끼게 된다.

 

 

최고의 무술인의 경지에 오른 거암은 일본인의 사주를 받고 만주일대의 무술도장을 찾아가서 수많은 무도가들을 쓰러뜨리면서 친일행각을 일삼게된다.

 

거암은 계속해서 만주의 여러도장들을 찾아가서 도전을 신청하였고 그의 손에 수많은 무도가들이 계속해서 쓰러져갔으며 만주의 무림세계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만주의 무도계의 질서를 깨뜨리는 거암의 도전행위는 일제가 만주를 힘으로 억누르려는 일제의 만주침탈정책을 이롭게 하였으며, 거암은 그것을 스스로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거암은 단지 만주 최고의 무도가로 우뚝 솟고싶은 욕망뿐이었다,

 

만주의 조선인사회는 거암의 도전행위를 친일행위로 규정하고 거암(왕호역)을 일제의 앞잡이라고 집중 성토하는데 결국 거암을 키웠던 스승 박상봉의 귀에 들어갔으며 거암 때문에 큰 피해를 입었던 한인들은 박상봉에게 거암을 단죄하라고 압력을 가한다.

 

 

박상봉은 자신의 양아들로 삼아 키워왔던 거암(왕호역)을 설득하려하였으나 끝까지 말을 듣지 않는 거암 때문에 몹시 괴로워한다.

박상봉은 결국 자신의 제자중에서 가장 무술실력이 뛰어난 일재(황정리)로 하여금 거암(왕호역)을 쓰러뜨리라고 명을 내리게 된다.

 

 

그런데 스승 박상봉에게는 아름다운 딸이 하나 있는데 바로 옥란으로 옥란은 거암과 미래를 약속했던 사랑하는 사이다.

박상봉 제자중에서 가장 무도실력이 뛰어났던 일재(황정리)가 거암에게 도전한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옥란(장순자역)는 급히 두사람의 대결을 말리려고 설득하기 위해서 일재를 따라나선다

 

거암(왕호)과의 대결을 하지말라고 일재(황정리)를 설득하는 옥란(장순자), 옥란는 두남자를 모두 사랑했다.

 

일재(황정리)의 출중한 무도실력을 너무나도 잘 아는 옥란는 두사람이 싸우면 반드시 한사람은 죽고만다는 사실을 잘 알고있었기 때문이다만주에서 최고의 무도가 자리를 놓고 일재(황정리)와 거암(왕호역)의 목숨을 건 한판승부가 벌어진다.

 

 

사실 방상봉의 딸 옥란는 어렸을 적부터 한집, 이웃집에서 함께 자란 일재(황정리)와도 친한 사이이며 거암(왕호)과는 이미 결혼을 약속한 사이인데 사실은 오래전부터 두 남자를 함께 좋아하고 있었다.,

그런데 최고의 무도가를 겨루는 대결이 펼쳐지게 됐고 둘중 한사람은 반드시 희생당하게 돼있다.

 

 

두 남자 모두 옥란에게는 혈육이상 가는 소중한 사람들이다. 둘중 누구도 포기할 수 없었던 옥란는 한없이 오열하면서 두사람의 대결을 말리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벌이지만 그녀의 눈물겨운 노력은 모두 허사가 되고 결국 운명의 시간은 다가왔다.

 

옥란(장순자)은 애인 거암(왕호)에게 일재(황정리)와의 대결을 하지말라고 눈물로 간청하고 있다.

 

옥란이 사랑하는 두남자 일재(황정리)와 거암(왕호)이 드디어 목숨을 건 한판 대결이 펼쳐졌다. 눈물을 흘리면서 메달려도 보고 간청해 보았지만 옥란의 누물어린 노력은 모두 허사가 되고 두사람은 결투를 별였다.

 

 

처음 대결에서는 한치의 흔들림 없이 두사람이 팽팽한 접전을 이어나갔지만 점점 시간이 흐르면서 거암(왕호)이 싸움의 승기를 잡아나간다. 결국 거암(왕호)의 집중 발차기공격과 날아차기를 얻어맞고 큰 충격을 받은 일재(황정리)에게 거암이 최후의 일격을 가하려고 하자, 옥란이 큰소리를 절규하는 바람에 거암이 잠깐 멈칫한 사이, 이때를 기회삼아 일재(황정리)의 명치공격이 날아들어 거암은 결국 쓰러지고 만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약혼녀 옥란이 부르짖었던 큰소리 때문에 연인 거암(왕호)은 승리를 목전에 둔 상태에서 역습을 당해 쓰러지게된 것이다. 

 

옥란의 절규 때문에 목숨을 건지고 승리를 따낸 일재(황정리)!, 그리고 옥란의 절규 때문에 다잡은 승리를 놓치고 목숨까지 잃게된 거암(왕호),

 

 

옥란는 두남자를 모두 사랑하고 있었던 것이며 두남자 모두 잃고싶지 않았던 것이다.

처음에 옥란가 두사람의 대결을 말리려고 했던 가장 큰 이유는 자신의 연인 거암(왕호)이 싸우다 죽을까봐 두려웠기 때문이었는데, 거암(왕호)이 훨씬 더 잘 싸우자 점점 시간이 지날수록 일재(황정리)를 살리려는 욕망이 커졌으며 결국 일재(황정리)를 살려주기 위해 큰소리를 질렀던 것이다.

 

 

자신의 약혼녀 옥란과 자신의 친구 일재(황정리)가 지켜보는 앞에서 숨을 거두는 거암(왕호)은 죽으면서 두사람이 행복하게 잘 살라는 마지막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하직하며 옥란은 오열한다.

 

친구이자 라이벌이었던 거암(왕호)을 쓰러뜨리고 슬퍼하는 일재(황정리)와 옥란

 

무술액션영화 치고는 매우 로멘틱한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영화가 바로 흑룡강이다. 대부분의 무술영화들이 로맨스는 약간의 맛배기나 양념차원에서 약간만 액션영화에 집어넣지만 로맨스는 전체내용의 10%를 넘지않는 게 무술영화의 관행이다. 그런데 흑룡강은 무술액션도 뛰어나지만 로맨스부분도 상당히 길게 이어지고 있다는 점이 매우 이채로운 부분이다.

 

 

 

 

 

이영화에서 두남자 사이에서 방황하는 애처로운 여인 옥란역을 맡았던 여주인공은 장순자로 그녀는 ‘7인의 말괄량이로 처음 데뷔했으며 이영화가 두 번째 작품이다. 70년대 후반 TV와 영화등에서 주로 조연급으로 활동했던 장순자는 79중원의 백일홍이라는 무술영화에서 또다시 여주인공으로 나와 열연했다.

 

영화 '흑룡강'은 왕호와 황정리가 최고의 무도가자리를 놓고 대결을 벌이는 마지막 장면이 명장면이다. 

두사람의 무술액션도 눈부시지만 두남자를 모두 사랑했던 옥란(장순자)의 눈물겨운 열연도 눈요기감으로 매우 볼만하며 진한 감동을 느끼게 한다.

 

아래 동영상은 영화 '흑룡강'의 후반부 영상으로, 왕호와 황정리가 최고의 무도가 자리를 놓고 대결을 펼치는 영상이다. 동영상 '흑룡강'은 외국에 수출된 영화라서 언어가 영어로 되어 있는데 줄거리는 위에서 언급했으므로 이해하기가 어렵지는 않을 것이다.

 

영상에서 옥란이 일재(황정리)를 칼로 찌르는 장면이 나오는 데 이것은 일재(황정리)의 다리에 부상을 입혀서 일재(황정리)가 싸움을 포기하도록 유도하려는 목적이었다. 옥란은 거암(왕호)과 재(황정리), 두남자를 모두 사랑했던 여인이다. 두남자의 대결을 어떻게든 말려보려고 간청하는 옥란의 몸부림이 매우 애처롭게 느껴진다.

 

 

왕호, 황정리 주연의 흑룡강영화 동영상 - 후반부 대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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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대 태권무술스타 한용철의 용호대련동영상, 한국무술영화 추천

 

 

1970년대 이소룡이라는 뛰어난 무술스타의 등장으로 아시아에 홍콩(중국)무술영화의 붐이 크게 일면서 이소룡영화는 순풍에 돛단 듯 엄청난 흥행을 불러일으켰고 아시아뿐만 아니라 세계영화시장에 권법무술영화라는 새로운 장르가 한호를 받게 되었다.

빠르고 절도있는 무술액션과 카리스마 넘치는 표정연기로 관객들을 완전히 압도해나갔던 이소룡은 세계적인 무술스타로 급부상하자마자 안타깝게도 뇌종양으로 사망하고 만다.

 

 

엄청난 흥행의 돌풍을 일으키며 홍행의 보증수표나 다름 없었던 불세출의 무술스타 이소룡이 사망하게 되자, 홍콩과 한국 영화계에서는 이소룡에 버금가는 새로운 무술스타의 발굴에 몰두했고 이소룡이 만들어놓은 무술영화의 흥행신화를 계속 이어나가고자 했다.

 

이소룡의 영화들이 한국에서 수많은 젊은팬들을 매료시키며 흥행을 대성공을 거두자, 한국영화계에서도 포스트 이소룡에 걸맞는 태권도 무도가들을 영입해서 새로운 무술영화 제작에 착수했는데 이러한 시기에 혜성처럼 나타난 무술배우가 바로 한용철이다.

 

당시 새로운 스타일의 영화를 모색하고 있었던 이두용감독은 한국적인 스타일의 무술영화를 기획하고 있었는데 1973년 이소룡이 사망한 직후 실시한 오디션을 통해 30여명의 태권도고단자들을 모집해놓고 있었지만, 결국 이들을 제치고 미국동포 출신의 약관 20세의 몸이 잘빠진 이쁘장하게 생긴 젊은이를 새로운 무술영화의 주인공으로 캐스팅했는데 그가 바로 한용철이다.

 

 

 

당시 20세 밖에 안된 한용철은 태권도 고단자는 아니었지만 큰키에 날씬하고 길게뻗은 다리와 준수한 외모를 지니고 있었고 발차기실력 만큼은 수준급이었다.

이소룡이 이룩해놓은 무술영화의 붐과 흥행을 한국에서 이어나가기를 바랬던 이두용감독은 한용철(챠리셀)을 주연으로 기용해서 전혀 새로운 스타일의 한국무술영화 용호대련을 만들었고 한용철은 이두용감독의 기대에 부응해서 화려하고 멋진 발차기액션을 펼쳐보이며 관객들을 환호와 열광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우수에 찬 표정을 한 채, 길게 쫙쫙 뻗으며 화려한 발차기액션을 보여준 한용철의 무술액션은 한편의 예술이라고 할 만큼 멋있었고 눈부셨다.

전혀 이소룡에 뒤지지 않을 정도의 화려하고 멋들어진 발차기액션으로 수많은 한국팬들을 매료시키며 큰 환호를 불러일으켰던 한용철의 무술영화들은 흥행에도 큰성공을 거두며 한국영화사의 한페이지를 화려하게 장식했다.

 

 

이소룡이 죽은 그 해 1973년 가을경 스카웃되어 이두용감독과 함께 작업했던 한용철은 이소룡의 홍콩식 무술영화와는 색다른 한국적인 독특한 스타일의 무술영화들을 6편이나 만들었으며 이들 영화들은 한용철의 화려하고 멋진 발차기액션과 잘짜여진 연출 덕분에 관객들의 큰 박수갈채를 받았고 흥행에도 큰 성공을 거두었다.

 

용호대련’ ‘죽엄의 다리’ ‘돌아온 외다리’ ‘분노의 왼발’ ‘후계자’ ‘속 돌아온 외다리6편의 무술영화들을 1년 사이에 모두 제작해 상영함으로써 이소룡의 죽음을 안타까워했던 수많은 무술영화팬들의 갈증을 속시원히 해갈시켜주었다.

 

 

 

이소룡이 흥행을 일으켰던 무술영화의 붐을 이소룡이 사망한 후 한국의 한용철이 다시 불씨를 일으켜서 한국형 태권무술영화라는 독특한 장르를 개척함으로써 무술영화의 인기와 흥행을 계속 이어나가던 것이다.

 

특히 1974년 초에 상영된 용호대련은 이두용감독과 함께 한용철이 출연해서 흥행에 성공한 작품으로 한국형 무술영화의 문을 열어제낀 한국무술영화의 효시라고 불리울 만한 기념비적인 영화이다.

한국에서 무술을 접목해서 최초로 만든 무술권법영화인 용호대련은 이소룡의 영화를 모방해서 만든 것이 아니라 한국 태권도의 화려한 발차기기술을 멋지게 활용한 전혀 색다른 한국적 스타일의 영화라는 데에 그 의미가 매우 크다고 평가할만 하다.

 

광활한 만주평야에 황금을 서로 차지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있는 두 일본야쿠자집단이 횡포를 일삼자, 어느날 홀연히 나타나 포악한 악당들을 화려한 태권도 무술로 순식간에 해치워버림으로써 마치 황야의 무법자처럼 스릴과 박진감을 안겨주어 관객들에게 통쾌함과 카타르시스를 안겨주는 매우 모험적이고 흥미로운 액션영화가 바로 용호대련이다.

영화의 탄탄한 내용구성이나 스릴감있고 박진감있는 무술액션에서나, 전혀 이소룡영화에 뒤질게 없는 흥미만점의 한국형 무술영화라고 극찬할 만하다.

 

 

이처럼 한용철의 용호대련이 큰 센세이션을 일으키면서 또다른 한용철의 무술영화들이 연이어서 만들어졌으며 죽엄의 다리’ ‘돌아온 외다리등 한용철의 후속작품들 또한 흥미진진한 내용들로 관객들의 큰 호응을 불러일으키면서 70년대 중반 한국무술영화의 붐을 크게 형성하였다.

 

영화 용호대련에서 한용철의 화려하게 눈부신 발차기액션을 보면 숨이 멎을 것같은 묘한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된다. 한용철의 스피드하고 현란한 발차기액션은 마치 한편의 예술작품을 보는 것처럼 아름답고 예술적이었다.

 

한용철의 발차기기술은 이소룡의 발차기기술과도 또다른 색다른 매력을 풍겨준다. 이소룡의 발차기는 주로 옆차기와 날아차기 위주로 되어 있어 단조로운 느낌이 들지만 한용철의 발차기는 앞차기, 돌려차기, 찍어차기등 태권도의 다양한 기술을 선보이고 있어서 더욱 화려하고 예술적이라고 느껴지며, 이소룡 사후에 이소룡의 아쉬움을 달래주기에 충분했고, 이소룡의 대리만족을 느끼기에 충분한 무술스타라고 할만하다.

 

 

이렇게 통쾌하고 멋진 한국무술영화가 있었다는 것을 모르고 자란 지금의 젊은이들에게 꼭 한번 보여주고 싶고 권하고 싶은 영화다. 우리나라에도 과거에 이소룡 못지않은 뛰어난 무술스타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주고 싶다.

 

이렇게 한국에서 73년 후반부터 75년 후반까지 2년 동안은 한용철이라고 하는 한국무술스타가 국내무술영화계를 주도했던 한용철의 전성시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한용철이 10편의 무술영화들을 찍고 75년말 자신의 본거지인 미국으로 돌아가버린 후에 한국무술영화계는 완전 난장판이 되어버리고 만다.

 

 

한용철이라고 하는 걸출한 무술스타가 사라져버린 76년 이후의 한국무술영화계는 또다른 무술스타들이 계속해서 등장하였지만 품질이 떨어지는 무술액션과 이소룡 흉내만 내는 이소룡 짝퉁배우들이 난무하면서 한국무술영화의 품질이 크게 떨어지게 되었고 졸속으로 제작된 질 떨어진 무술영화들과 짝퉁영화들의 범람에 크게 실망한 많은 무술영화팬들이 등을 돌리고 만다.

 

이때부터 한국무술영화들은 B급영화, 저질영화라는 꼬리표가 붙게되었고 수많은 관객들을 멀어지게 만들었으며 결국 그 이후에 나온 무술영화들은 흥행에서 실패하게되고 그대신 멜로영화나 호스티스영화들이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된다.

 

아뭏튼 홍콩에는 이소룡이라는 뛰어난 무술스타가 있었던 것처럼 한국에는 한용철(챠리셀)이라고 하는 뛰어난 무술스타가 있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 두사람이 떠난 이후 한국과 홍콩의 무술영화들은 팬들이 외면하는 B급무술영화들과 수많은 짝퉁무술영화들이 난무하게 되어 80년대에는 관객들의 외면으로 한국무술영화가 사장되고 만다.

 

 

용호대련에는 70년대 크게 인기를 끌어던 여배우 우연정이 여주인공으로 출연하는데 우연정은 글래머스한 몸매와 섹시한 마스크로 당시 남성팬들에게 크게 어필했던 한국의 섹시스타다. 우연정은 한국의 킴 노박이라고 불리우며 많은 멜로영화와 액션영화에 출연해서 많은 남성팬들의 가슴을 설레이게 했던 70년대를 대표하는 글래머스타로 명성이 높은데 영화 용호대련에서도 비중있는 역할과 글래머스한 매력을 어필하여 영화의 감초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한용철의 영화 용호대련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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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대 무술스타 왕호의 70년대 무술영화 사대맹룡

 

 

70년대 우리나라 극장가는 무술액션영화가 크게 붐을 이루면서 흥행을 주도하던 시기였다. 이소령이라는 불세출의 무술스타가 출현하면서 무술액션은 하나의 영화 트랜드로 각광을 받던 시기였다.

이소령이 출연했던 무술영화들이 흥행에 크게 성공을 거두자 한국영화계에서는 이소령에 버금가는 한국무술스타들을 집중 발굴해서 한국적인 무술액션영화의 제작에 몰두했던 시기가 바로 70년대였다.

 

 

무술영화가 흥행의 보증수표로 두각을 나타내자 한국에서 찾아낸 무술예비스타들을 한용철, 바비킴, 그리고 왕호였다.

무술영화의 흥행신화를 열어제꼈던 이소룡이 죽은 후 1년 뒤인 74년 한국에서는 태권도사범 한용철을 기용해서 한국적인 무술영화를 만들었고 한용철이 화려한 발차기액션을 선보였던 한국무술영화들은 어느정도 흥행에 성공하면서 새로운 한국무술스타들이 계속 등장하는 계기를 마련한다.

 

이렇게 무술영화의 붐이 형성되었던 70년대 중반 새로운 한국의 무술스타가 등장하는데 바로 왕호다. 왕호는 해병대 태권도 대표선수를 지낸바 있는 태권도 고단자로 태권도사범 출신이다.

 

76년 영화 '밀명객'의 왕호의 발차기액션

 

왕호는 76년 한국무술영화 흥룡강에 출연하면서 영화계에 데뷔했으며 그후 밀명객등 한국무술영화 몇편을 더 찍으면서 한국무술영화의 중흥을 이끌어갔는데 왕호의 뛰어난 발차기기술과 화려한 무술액션이 크게 주목을 받게 되자 중국과 홍콩에서 왕호의 무술실력을 높이 평가하게 되었고 영화출연 제의가 잇따르자 왕호는 본격적으로 홍콩무술영화계에 진출한다

왕호는 그당시 무술영화의 메카나 다름없었던 홍콩에 진출하여 중원호객’ ‘북소림 남태권(北少林 南跆拳)’ 등에 출연하면서 국제적인 무술스타로 발돋움한다.

 

 

그당시 왕호의 무술액션은 다른 액션배우들에 비해 단연 돗보였으며 실전무술실력을 바탕으로 하는 그의 무술액션을 화려함과 현란함의 극치였다.

영화에서 보여주는 왕호의 날아차기와 가위차기는 그 자체가 하나의 예술이었으며 관객들은 왕호의 현란한 발차기기술에 환호했고 제2의 이소룡으로서 명성을 쌓아가기에 충분했다.

 

홍콩(중국)에 진출해서 뛰어난 무술실력을 선보이면서 무술스타로서 명성을 높여나갔지만 왕호는 외국배우라는 한계를 넘어서지 못했고 홍콩에서 홍콩출신배우들이 주연한 영화에 무술액션만을 기계적으로 선보이는 조연역할을 넘어서지 못하게 된다.

홍콩(중국)배우들이 결코 따라하지 못하는 뛰어난 발차기액션과 무술기술을 보유하고 있었던 왕호는 홍콩무술영화계에서 외국배우라는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포스트 이소룡이라는 세계적인 무술스타로서의 성장을 이루지못하고 결국 귀국할 수밖에 없었다.

 

홍콩영화 '중원호객'에서 눈부신 가위차기 액션을 선보인 왕호

 

당시 권법무술영화가 크게 붐을 이루었던 홍콩(중국)에서는 홍콩무술영화의 주인공은 잘나던 못나던 반드시 홍콩사람이어야만 했으며 한국에서 건너온 뛰어난 무술배우들은 철저히 조연급이하의 역할에 묶어두는 것이 관례였다.

2의 이소령자리를 외국인에게 넘길 수는 없다는 논리였다. 무술영화의 중흥기였던 70년대 중후반 신일용, 황인식, 황정리, 왕호 같은 우수한 무술배우들이 홍콩에 스카웃되었지만 이들 대부분 홍콩무술영화에서 조연급으로 활동하는 등 들러리로 만족해야만 했다.

 

2의 이소룡으로 키워진 성룡이 출연한 영화들에 황인식이나 황정리같은 뛰어난 한국무술배우들은 잠깐 영화의 재미를 돗구아주는 기계적인 발차기기술만 선보이고 사라지는 들러리역할로 전락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왕호 또한 마찬가지로 당시 인지도를 높여가던 골든하베스트의 홍금보를 키워주기 위해 만들어진 홍콩무술영화에 왕호는 단지 가위차기 같은 멋진 발차기기술을 몇 번 선보인 후 사라지는 비중낮은 조연급으로 출연했을 뿐 자신의 무술실력에 비해 더 이상 성장할 수 없었다.

 

 

 

당시 한국영화계에서 무술액션영화를 천대하는 경시풍조와 열악한 영화제작환경과 부족한 연출력 때문에 세계적인 무술스타로 성장할 수 있었던 뛰어난 무술스타가 국내무대에서 성공하지 못하고 홍콩 같은 외국에서 무술조연급 신세를 질 수밖에 없는 당시의 편협적인 우리나라 영화환경이 왕호 같은 뛰어난 무술스타를 사장시켜버린 것이나 다름없다.

 

이소룡이 무술과 영화와 접목시키면서 예술성 높은 무술영화를 창조하면서 커다란 흥행을 이룩했던 것과 비교하면 당시 우리나라 무술영화계는 자본과 연출등 모든 것이 낙후상태에 있었고 무술액션영화는 3류영화라는 경시풍조 때문에 세계무술스타로 발돋움할 수 있는 아까운 무술스타의 발목을 잡았던 것이다.

 

아뭏튼 이소룡 못지않게 뛰어난 무술실력을 보유하고 있었던 왕호는 비록 이소룡처럼 세계적인 무술스타로 성장하지는 못했지만 그의 화려한 발차기액션과 멋진 고공 점프킥을 감상할 수 있는 몇편의 영화들을 남겨놓았다.

왕호가 70년대 후반에 출연해서 무술영화팬들에게 큰 환호를 받았던 한국무술영화들이 있는데 바로 77년 제작된 영화 사대맹룡인데 이 영화에서 왕호는 화려하고 예술적인 발차기 무술액션을 선보였고 그의 멋진 무술액션이 눈부시게 빛났던 한국무술영화다.

 

 

이영화 사대맹룡을 감상해보면 저 정도의 뛰어난 무술액션이라면 아시아를 아우르는 국제무술스타로 성장할 수 있었는데 하는 아쉬움이 남게 된다.

이소룡의 발차기기술이 태권도에서 배워간 기술이라는 것은 이미 밝혀진 지 오래됐는데 태권도의 종주국인 우리나라 영화계의 잘못된 편견 때문에, 무술영화에 대한 지원이 이루어지지 않아서 뛰어난 잠재력을 가진 무술스타들이 사장되고 무술영화의 붐이 맥을 잇지 못하게된 것이 안타깝기만 하다.

 

반면 홍콩은 그당시 성룡, 홍금보 같은 전문무술인이 아닌 배우가 아낌없는 경제적 지원을 받아 세계적인 무술스타로 급성장하고 세계적인 명성을 떨친 것과 너무나도 대조적이다.

우리나라도 충분히 성룡 이상의 무술스타가 될 수 있는 재목들이 풍부했는데 무술과 액션을 경시하는 편협한 편견과 풍조 때문에 무술영화의 발전을 스스로 꺾어버린 셈이다.

 

 

70년대 중반부터 80년대 초반까지 화려한 무술액션으로 우리 무술영화계를 압도했던 태권도의 제왕 왕호의 영화 사대맹룡을 감상하면서 그의 눈부신 발차기액션의 묘미를 느껴보자! 영화 사대맹룡은 왕호와 여자무술스타인 서영란이 주연으로 출연한 77년도에 제작된 김정용감독의 한국무술영화이다.

 

 

 

또한 왕호가 홍콩에 진출했을 무렵 이소룡의 유작 사망유희에 악역으로 출연하여 이소룡 대역으로 출연했던 김태정과 한판 승부를 펼치는 연기를 했었는데 골든하베스트사가 78년도에 야심차게 만들었던 이소룡의 유작 사망유희에서 당시 이소룡역으로 출연했던 김태정과 왕호는 영화의 후반부에 식물원에서 멋진 승부를 겨루는 장면이 나온다. 

이소룡대역으로 발탁되어 이소룡흉내를 내던 김태정보다 더 뛰어난 무술액션과 더 멋진 발차기기술을 보여주었던 왕호였지만, 아쉽게도 악역이란 배역의 한계상 이소룡(김태정)에게 패배하는 연기를 보여준 바 있다

 

 

왕호의 사대맹룡영화 후반부 동영상

 

 

 

 

 

 

 

 

사망유희에서 이소룡(김태정역)과 결투를 벌이는 왕호의 액션영상

 

 

 

 

 

 

홍콩영화에 나오는 왕호의 현란한 발차기 동영상

 

 

 

 

 

 

 

 

 

 

 

 

영화 '사대맹룡'에서 왕호와 호흡을 맞춘 여자무술배우 서영란

최근의 왕호의 사진, 왕호는 천지무예도협의를 이끌고 있으며 2014년 밀양 천경사에 왕호예술학교를 설립해서 후진무도가들을 육성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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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프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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