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산테러로 알려진 관악경찰서 테러사건은 국립과학수사연수소의 분석결과 염산이 아닌 '황산테러'인 것으로 밝혀졌다.
4월 4일 서울 관악경찰서에서 경찰관에게 한 여성이 황산을 투척하는 끔찍한 사건이 발생했다고 한다. 관악경찰서에서 경찰관에게 황산을 투척한 30대여성 전씨는 경찰관에게 앙심을 품고 이같은 짓을 저지른 것으로 추청된다.
4일 오전 8시 45분경 관악경찰서 3층 사이버수사팀으로 찾아왔던 38세의 여성 전씨는 복도앞에서 박경사등 4명의 경찰관들에게 염산을 추척했다고 한다.
사이버수사팀에 찾아온 전씨는 황산이 든 보온병과 과도 한자루를 들고온 것으로 알려졌다.
전씨가 뿌린 황산을 정면에서 얼굴에 맞은 박경사(44세)는 신체전체의 4%에 심한 3도 화상을 입었으며, 나머지 세명의 경찰관들은 경미한 화상을 입고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다고 한다.
황산을 정면에서 맞았던 박경사는 현재 얼굴, 목, 앞가슴부위에 3도화상을 입고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있는 중이다.
전씨는 2013년도 9월 헤어진 전 남자친구가 자꾸 찾아오며 스토킹을 한다는 혐의로 사이버수사팀에 고소를 했던 적이 있었는데, 그당시 경찰의 조사결과 혐의가 인정되지 않아 고소 각하처분이 내려졌다고 하는데,
아마도 전씨는 이당시의 사건이 자신의 뜻대로 이뤄지지 않아서 앙심을 품고 범행을 저지른 것이 아닌가 사료된다.
그런데 전씨가 뿌렸던 염산을 맞은 박경사는 2013년도 사건을 담당한 경찰관이 아니라, 단지 상담을 해주었던 경찰관이라고 한다.
그리고 전씨는 금년 2월에 자신이 사는 원룸의 이웃집 유리창을 파손한 혐의로 경찰조사를 받았는데, 이 당시 전씨는 안면이 있는 박경사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부서가 달라 개입할 수 없다며 박경사가 거절했다고 하며, 전씨는 이에 앙심을 품고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 상황이다.
전씨는 과거 자신에게 친절히 상담해줬던 박씨가 이번사건에서 도와달라는 자신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자, 앙심을 품은 것이 범행의 원인으로 보인다.
전씨는 경찰조사에서 ‘과거에 친절하게 상담해주었던 박경사가 내편을 들어주주 않았으며, 시민은 알권리가 있는데, 경찰이 자꾸 피해서 화가 났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경찰에서는 전씨에게 프로파일러 조사를 실시했다고 하는데, 전씨는 주변의 자극을 자신에 대한 위협으로 생각하는 피해망상 증세가 심한 것으로 나타났다고있다.
관악경찰서는 전씨에 대해 특수공무집행방해 및 치상혐의로 곧 구속영장을 청구할 방침이라고 한다.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감식의뢰한 결과가 전씨가 뿌렸던 액체가 염산이 아닌 황산인 것으로 밝혀졌다고 한다.
전씨의 진술에 따르면 전씨는 누군가로부터 협박하는 전화가 자꾸 걸려와서, 호신차원에서 작년 11월에 인터넷을 통해서 황산, 야구방망이 가스총등을 구입했다고 한다.
전씨의 이러한 일련의 행동을 보면, 피해망상증이 분명히 있는 것으로 보이며, 과거 한의원에서 우울증증세로 치료받았던 경력도 있어서 정신질환 증세가 이번 범행의 근본 원인이 아닌가 사료된다.
여기 동굴과 관련해서 미스테리하면서도 소름끼치는 이야기가 하나 있다. 이세상에서 가장 끔찍하고 무서운 동굴은 어디에 있을까?
러시아의 시베리아남부에 위치한 카시쿨락산에 있는 동굴에 관한 섬뜩한 이야기가 오래전부터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러시아 시린스키지역에 있는 카시쿨락스카야동굴은 예로부터 무섭고 공포스러운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는데, 이 동굴속에 들어간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1965년 카시쿨락스카야동굴에 한 등산객일행이 함께 들어갔다고 한다. 그들은 820m 길이의 신비롭게 생긴 이 동굴을 탐사하기 위해서 20명의 일행이 함께 동굴로 들어갔다고 한다.
카시쿨락 스카야동굴은 시린스키지역의 험준한 산악지역에 위치하고 있어서, 일반사람들의 눈에 잘 띄지않는 신비로운 동굴로서, 동굴안에는 여러 가지 형태의 다양한 종유석들이 즐비해있다고 한다.
그런데 1965년 20여명의 등산객일행이 카시쿨락스카야동굴에 들어갔는데 그만 충격적인 일이 발생했다고 한다. 함께 동굴에 들어갔다가 살아나왔던 사람은 단 2명의 여성들뿐이라고 한다.
카시쿨락 스카야동굴에 들어갔다가 가까스레 탈출해 나왔던 두명의 여성은 그곳을 지나가던 한 주민에게 발견되었다고 한다.
한 여성은 마치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그곳 주위를 방황하고 있었으며, 다른 여성은 엄청난 공포감에 사로잡혀서 잔뜩 겁을 집어먹고 있었다고 한다.
동굴밖으로 나온 두여성은 한 주민에게 자신들의 일행을 구출해달라고 애원했다고 한다. 두 여자의 말에 따르면, 함께 동굴로 들어갔던 20명의 일행 중 자신들만이 동굴밖으로 탈출해 나왔으며, 나머지 18명의 사람들은 동굴속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고 한다.
두여성의 구조요청을 받은 구조대원들이 카시쿨락스카야동굴안과 주변을 샅샅이 수색해보았지만, 사라진 18명의 일행들은 찾을 수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더욱 충격적인 사실은 그 두여성이 카시쿨락스카야동굴안에서 악령을 보았다고 주장했다는 사실이다.
일행들이 그 동굴탐사를 위해서 동굴안 깊숙한 곳까지 한참 걸어들어갔는데, 갑자기 정체불명의 악령이 나타나서 그들을 크게 위협했다고 하며, 겁을 먹은 두여성은 황급하게 그곳을 탈출해서 동굴밖으로 뛰어나왔다고 한다.
그런데 나머지일행 18명은 그곳을 탈출하지 못했다고 하며, 그 18명의 사람들은 구조대의 수색에도 불구하고 끝끝내 찾을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실종된 18명의 사람들은 동굴속에서 악령에게 죽임을 당했다는 말인가?
정말 믿기 힘든 미스테리하고 황당한 이야기가 아닐 수가 없다. 동굴안에서 18명이나 되는 대규모인원들이 감쪽같이 사라지다니!
큰 공포감에 사로잡혀있는 두명의 여성은 치료를 받기위해서, 정신병원에 수용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한 여성은 정신병원에 수용된 지 한 달만에, 원인을 알 수 없는 질환으로 갑자기 숨졌다고 한다. 그리고 다른 한 여성은 완전히 미쳐버려, 다시는 제정신으로 돌아오지 못했다고 한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난 후에, 그곳 카시쿨락스카야동굴에서 미스테리한 일이 또다시 발생했다고 한다. 그곳 시린스키지역 부근에 살던 일련의 학생들이 카시쿨락스카야동굴로 견학을 왔다고 한다.
동굴로 함께 들어갔던 학생들은 동굴속에서 갑자기 나타난 악마를 목격했다고 하며, 혼비백산해서 모두 동굴밖으로 뛰쳐나왔다고 한다. 그런데 그 학생들 중 집으로 돌아온 한 학생이 ‘죽는다. 하지만 돌을 기억하고 있다’는 메모를 남긴 후에 곧바로 숨을 거뒀다고 한다.
그후에도 그 카시쿨락스카야동굴로 찾아왔던 수많은 탐험대원들과 등반객들이 동굴속에서 무시무시한 악마를 보았다거나, 정체불명의 괴생명체를 보았다는 목격담들이 계속 흘러나오고 있다고 한다.
그런 후에도 과학자들이나 탐사대들이 그 동굴을 과학적으로 규명해보기 위해 다각적인 시도가 이뤄졌다고 하는데, 그들이 그 동굴을 탐사하는 과정에서, 섬뜩한 공포감, 집단환각 증세,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이한 일들이 자꾸 일어나서 조사활동을 방해받았다고 하며, 대부분의 과학탐사대들이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러던 중, 1993년 러시아 노보시비르스크 임상실험의학연구소의 알렉산더 트로피모프박사가 카시쿨락 스카야동굴에 대한 이야기를 접하게 됐고, 그는 5명으로 이뤄진 탐사대를 구성해서, 카시쿨락스카야동굴을 탐사하기 위해 떠났다고 한다.
카시쿨락산 부근에 도착한 알렉산더박사 일행은 그지역에 사는 주민들을 찾아가서, 카시쿨락스카야동굴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고 한다.
그지역 주민들의 설명에 의하면, 카시쿨락스카야동굴이 있는 시린스키지역에서는 오랜된 전설이 하나 전해져내려오고 한다.
그 전설에 의하면 몽골족의 후손으로 알려진 고대 하카스족이 카시쿨락산 부근에 살고있었는데, 그 하카스족은 카시쿨락스카야동굴속에 사람을 닥치는 대로 죽이는 무시무시한 악마가 살고있다고 믿고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곳의 주술사가 그 동굴속으로 들어가서, 그 무시무시한 악마를 달래주기 위해서, 정기적으로 의식을 치렀다고 한다. 그리고 주술사가 의식을 치를 때마다, 사람과 동물을 그 희생제물로 바쳤다고 한다.
그곳 원주민들의 말에 의하면, 지금도 죽은 주술사의 영혼이 그동굴에 남아있어서 동굴안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을 제물로 바치기 위해서 생명을 앗아간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지역 주민들은 카시쿨락스카야동굴을 ‘검은악마의 동굴’ 또는 ‘하얀주술사의 동굴’이라고 부르며 매우 두렵게 생각하고 있으며, 절대로 그 동굴안으로는 들어가지 않는다고 한다.
알렉산더 탐험대는 카시쿨락스카야동굴속으로 들어가서 조사를 시작했다고 한다. 동굴속 곳곳에 다양한 전자측정장비를 설치하면서, 동굴 깊은곳으로 들어갔던 탐험대원들은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극심한 공포감에 사로잡혔다고 한다.
알렉산더 탐험대가 들어갔던 그 동굴속에는 재물로 사용된 듯한 사람들의 뼈와 동물의 뼈가 이곳저곳에서 발견되었다고 하며, 동굴 깊숙한 곳에서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언가를 목격하고는 대원전원이 두려움을 느끼고 동굴밖으로 철수해버렸다고 한다.
카시쿨락스카야 동굴탐험에서 돌아온 알렉산더박사는 탐험결과를 발표하였는데, 그들이 카시쿨락스카야동굴에서 본 것은 실제 유령이 아니라 착시에 의한 환각일 뿐이라고 발표했다.
카시쿨락스카야동굴속에는 강력한 저주파 자기장이 흐르는 것을 감지했으며, 강력한 저주파로 인해서 사람들은 공포감이나 착시, 환각현상에 빠지게 된다고 한다.
동굴속에서 강력한 저주파가 흘러나와 동굴속으로 들어갔던 사람들이 환각이나 착시, 공포감을 경험했던 것이라고 알렉산더 박사는 주장하고 있다.
그런데 그같은 강한 저주파가 동굴의 어디부분에서 시작되는 지에 대해서는 알렉산더 탐험대는 밝혀내지 못했다고 한다. 또한 왜 하필 그 카시쿨락스카야동굴에서만 그같이 강한 저주파가 흘러나오는지에 대한 이유도 알아내지 못했다고 한다.
알렉산더박사팀도 카시쿨락스카야동굴의 미스테리를 충분하게 밝혀내지 못했던 것이다.
정말 신기하고도 기이한 일이 아닐 수가 없다. 그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카시쿨락스카야동굴속에서 목격했다는 정체불명의 존재가 단지 환각작용의 부산물이라고 하니!
그렇지만 그 지역의 원주민들은 지금도 그 카시쿨락 스카야동굴속에는 주술사의 영혼이 살고있다고 굳게 믿고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주술사의 영혼은 동굴속에서 만나는 사람들을 저승의 세계로 데려간다고 한다. 즉, 그 카시쿨락스카야동굴속 깊은 곳에는 이승에서 저승으로 넘어가는 문이나 입구가 있다고 한다.
오늘날 하카스지역에 있는 카시쿨락스카야동굴은 세상에게 가장 공포스러운 장소로 손꼽히는 지역이 되었다.
조선 숙종시대에서 영조시대까지의 흥미진진한 역사이야기를 그려나갈 SBS드라마 ‘대박’이 전격 방영되었고, 3월 28일 첫날 ‘대박’시청률이 12%를 상회하면서 최고의 시청률을 기록했다고 한다.
우리나라 조선시대 인물중에서 가장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간 두명의 여인, 장희빈과 인현왕후는 드라마의 소재감으로 최고라고 할 만하다.
서양화가가 그린 장희빈 초상화
앞으로 드라마 ‘대박’에서 숙종을 사이에 두고 치열한 경쟁을 벌여나갈 장희빈과 인현왕후의 멋지고 드러매틱한 이야기가 사뭇 기대가 된다.
그런데 ‘어메이징스토리 싸인’에서 드라마 ‘대박’의 두주인공 인현왕후와 장희빈이란 인물에 대해서 분석하고, 두사람의 실제 모습을 묘사해서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숙종을 사이에 두고 서로 치열한 경쟁을 벌였던 장희빈과 인현왕후의 실제모습은 어떠했을까? 장희빈은 역대 드라마에서 묘사된 것처럼 희대의 악녀였을까? 그리고 후덕하고 인자하기 그지없는 인현왕후의 모습 또한 사실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다.
‘어메이징 스토리 싸인’에서는 왕조실록 등 역사적 기록을 바탕으로 해서 두사람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는데, 정사에 기록된 인현왕후와 장희빈의 실제 모습은 ‘인현왕후전’ 같은 드라마나 소설에 나오는 모습과 다른 점이 있어서 놀라움을 주고 있다.
장희빈은 1701년 인현황후 민씨를 저주한 죄목으로 숙종으로부터 사약을 받게된다. 그런데 우리에게 알려진 바는, 장희빈은 숙종이 내린 사약을 세 번이나 거부했을 정도로 엄청난 발악을 했다고 한다.
또한 장희빈은 사약을 받는 자신을 구명하러 왔던 자신의 아들인 세자(경종)의 고추를 잡아당겨서, 성불구자로 만들었으며 이것은 일종의 보복으로 이씨왕조의 대를 끊기 위함이라고 한다.
장희빈은 세자를 낳았던 자신의 목숨을 끊으려고 하는 숙종에게 복수를 하기위해서, 세자(경종)를 성불구자로 만드는 폐악을 저질렀다고 하며, 실제로 경종은 나중에 왕이 된 후에 후사를 보지못한 채, 병에 걸려 일찍 숨졌다고 한다.
이렇게 장희빈은 희대의 악녀이자 요부로 묘사되어 왔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장희빈을 조선시대 후궁중에서 최고로 악덕한 요부라고 인식하고 있다.
정말 장희빈은 인현왕후를 저주한 것이 사실일까? 그리고 자신의 아들인 경종에게 그런 폐악을 저질렀을까?
그런데 조선왕조실록 등 정사에는 장희빈이 사망할 당시 전혀 다른 내용이 기록되어 있어서 놀라움을 주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의 숙종실록을 살펴보면, 위의 내용과 전혀 다른 내용이 나오는데, 1701년 숙종이 장희빈에게 자결하라고 명을 내렸다고 하며, 장희빈은 세자의 장래를 위해서 스스로 자결했다고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숙종실록에는 장희빈이 숙종이 내린 사약을 거절했다는 기록이 전혀 없으며, 또한 장희빈이 세자를 성불구자로 만들었다는 내용도 전혀 없다고 한다.
오히려 장희빈은 숙종이 자결명령을 내리자, 아주 순순히 그 명을 따라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한다. 아들인 세자(경종)의 장래를 위해서 어미로써 순순히 죽음을 선택했다고 한다.
그간 드라마나 소설을 통해서 우리에게 알려진 장희빈의 모습과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서 큰 놀라움을 주고 있다.
장희빈이 숙종의 사약을 세 번이나 거부했다거나, 세자의 고추를 잡아당겨서 성불구자로 만들었다는 등의 내용은 정사의 기록이 아니라, 주로 노론(서인)인사들이 쓴 야사나 소설의 기록이라고 한다.
장희빈으로 인해서 서인세력의 인사들이 많이 죽음을 당하였고, 유배를 가는 등 정치적 박해를 많이 당하였다. 서인세력 중 특히 노론사람들이 많이 고통을 당하였다.
장희빈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하고 권력을 잃었던 서인(나중에는 노론)사람들은 장희빈에 대한 적개심과 복수심이 상당했을 것이고,
나중에 장희빈이 죽고 난후에 정권을 다시 장악한 서인(노론)사람들이 이런 야사와 소설을 써서 인현왕후를 숭고한 인물로 높이고, 장희빈을 폐악한 요부로 만들었던 것이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는 말이 있다. 숙종 때에는 장희빈을 지지하는 남인세력과 인현왕후를 지지하는 서인세력들간의 당쟁이 극심했던 시절이었고, 남인이 권력을 장악했을 때에는 장희빈의 위세가 높았던 시기이며, 서인이 권력을 장악했을 때에는 인현왕후의 위세가 높았던 시기와 일치한다.
그렇지만 최종적으로 권력을 다시 장악했던 서인(노론)세력이 자신들의 정적이었던 장희빈을 폐악하고 폐덕한 인물로 묘사한 것이라고 보여진다. 장희빈 때문에 서인의 거두인 송시열, 김수흥, 김수항 등 많은 서인세력들이 죽임을 당했기에, 그들은 장희빈을 폐악한 악녀로 만들 이유가 충분했다고 본다.
조선왕조실록에도 장옥정(장희빈)은 뛰어난 미색을 갖춘 절색의 미녀라고 묘사되어 있다. 장희빈은 변변치않은 가문인 역관의 딸이었지만, 어린 시절 궁궐로 들어와서 빼어난 미모 덕분에 숙종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1686년 숙원에 책봉되었으며 숙종의 뜨거운 총애를 받았다고 한다.
뛰어난 미색으로 숙종의 총애를 한껏 받았던 장옥정(장희빈)은 1689년 왕자(경종)를 낳음으로써, 그 위세가 더욱 커지게되고 조정에 평지풍파를 일으키게 된다.
장옥정(장희빈)이 숙종의 최초의 아들을 낳게되자, 숙종의 장옥정에 대한 총애는 더욱 커질 수밖에 없었고, 왕자정호사건이 터지게 되어 송시열등 수많은 서인사람들이 목숨을 잃거나, 유배를 떠나는 등 정국에는 엄청난 소용돌이가 몰아치게 된다.
그리고 서인세력이 권력을 잃게되자, 서인세력의 지지를 받고있던 인현왕후는 폐비되어, 궁궐에서 사가로 쫒겨나게 된다.
그동안 덕망이 높고 인자한 성품을 지녔다고 알려진 인현왕후의 실제 모습은 어떠했을까?
그동안 후덕하고 자비로운 성품의 착한 왕비로 묘사되어온 인현왕후는 야사나 소설 ‘인현왕후전’ 등에서 항상 장희빈의 못된 계략 때문에 피해를 당하고만 살아왔던 선한 이미지의 왕후로만 알려졌다.
그런데 숙종실록에는 여태까지 알려진 것과 다른 전혀 새로운 인현왕후의 모습이 기록되어 있어서 충격을 주고 있다.
숙종실록의 기록을 살펴보면, 숙종은 인현왕후를 폐서인하면서 그 이유를 비망기에 내렸다고 하는데, 인현왕후가 장희빈을 심하게 질투했다고 하며, 장희빈이 임신을 하게되자, 인현왕후는 숙종에게 장희빈이 팔자에 아들이 없다고 말하면서, 장희빈을 멀리 하라고 말했다고 한다.
즉, 인현왕후는 장희빈이 아들을 낳을 가능성이 없다는 말로 숙종을 현혹시키면서, 숙종과 장희빈 사이를 떼어놓으려고 시도했던 것이다.
또한 인현왕후는 숙종에게 자신의 꿈이야기를 했다고 하는데, 자신의 꿈속에서 선왕이 나타나서, 장희빈은 전생에 원한을 가진 짐승으로 복수를 위해 환생하였으니, 장희빈을 멀리해야 한다고 자신에게 말해주었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실제로 ‘숙종실록 17권’의 기록에는 ‘중전(인현왕후)이 장희빈의 팔자에는 아들이 없다고 임금(숙종)에게 거짓을 고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장희빈이 숙종의 사랑을 독차지하게 되자, 인현왕후는 장희빈을 심하게 투기했으며, 장희빈을 중상모략했다는 새로운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이러한 내용은 숙종실록에 나온 기록이며, 숙종이 인현왕후를 폐비시키는 벌을 내리면서 말했던 내용이라고 한다.
또한 인현왕후는 대전의 내관을 돈으로 매수했다고 하는데, 인현왕후는 내관을 꼬셔서 장희빈이 병으로 누워있어서 모실 수 없다는 거짓된 말을 숙종에게 하게 해서, 숙종과 장희빈이 잠자리를 하지못하도록 방해했다고 한다.
아니, 한나라의 국모가 내관을 금품을 주어서 매수했으며, 거짓고변을 하게 만들어서 두사람의 잠자리를 방해했다는 놀라운 사실이다. 알고보면 인현왕후는 다른 여자들과 마찬가지로 엄청난 투기와 질투심을 지닌 여성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인현왕후는 장희빈에게 허황된 소문을 퍼뜨린다며, 회초리를 때렸다고 한다.
장희빈이 임신을 하게되자, 아들을 임신했다는 허황된 소문을 퍼뜨렸다는 이유로, 인현왕후는 장희빈을 호출했으며, 장희빈의 종아리를 걷어서 회초리를 때렸다고 한다.
또한 이 사실을 알고 문책하러온 숙종에게 인현왕후는 아들을 임산한 장희빈이 왕비의 자리를 넘보며 위협을 해와서, 어쩔 수없이 회초리를 댔다고 거짓변명을 했다고 한다.
장희빈이 임신을 하게되자, 인현왕후가 장희빈을 극심하게 투기했던 것이다.
참고로 인현왕후는 평생 자식을 한명도 낳지못했다고 한다.
그동안 우리가 알고있었던 항상 덕망 높고 인자하고 자비로운 모습의 인현왕후의 모습과는 너무도 다른 모습이라서, 큰 놀라움을 주고 있다. 인현왕후도 어쩔 수 없는 질투를 할 수밖에 없는 여인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재미있는 사실이 하나 있다. 장희빈이 아들을 임신했다고 허황된 소문을 퍼뜨린다고 인현왕후에게 밀고했던 궁녀가 나로 나중에 최숙빈이 되는 최무수리라고 한다.
최무수리는 나중에 성은을 입고 왕자를 낳게되는데, 그 왕자가 바로 조선 21대임금인 영조다.
나중에 영조를 낳게될 최무수리(최숙빈)가 이 때에는 인현왕후를 모시던 궁녀였던 것이다. 최무수리(최숙빈)는 이시절 인현왕후전에서 물을 길어나르는 무수리의 신분이었던 것이다.
아뭏튼 최무수리(최숙빈)는 자신이 모시는 인현왕후를 위하는 마음에서 장희빈이 임신을 해서 위세를 부린다는 사실을 좀 과장해서 고해바친 것이다.
그리고 장희빈이 아들을 낳았고 인현왕후의 거짓된 말은 들통이 나게되었다. 당시 장희빈이 낳은 왕자(경종)의 명호를 정하라는 숙종의 명령에 송시열 등 서인세력들이 반대를 하자, 노여움에 사로잡힌 숙종은 송시열등 서인사람들을 많이 죽이고 축출해버렸다고 한다.
장희빈이 낳은 왕자의 명호를 정하게 되면, 장희빈이 낳은 왕자가 숙종의 후계자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서인세력은 아직 20대 후반인 인현왕후가 아기를 낳을 때까지 왕자명호를 미루자고 주청했던 것이다.
결국 기사환국이 일어났고, 숙종은 정권의 중심세력이었던 서인세력을 모두 축출해버렸으며, 서인세력의 지지를 받고있던 인현왕후도 함께 폐서인되어 궁궐밖에 유폐된 것이다.
그런데 숙종의 첫왕자를 낳아주면서 숙종의 끔찍한 총애를 받았던 장희빈이 1701년 갑자기 사약을 받게된 것이다. 어찌된 일인가?
인현왕후가 궁궐밖으로 쫒겨난 지 4년이 지난 1693년 어느날, 밤중에 궁궐 이곳저곳을 시찰하고 있던 숙종은 큰소리로 곡하고 있는 한 궁녀의 목소리를 듣게된다.
이상하게 생각한 숙종은 그 궁녀의 방문을 열어보았는데, 그 방안에서 한 궁녀가 절을 올리며 곡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바로 그 방안에있던 궁녀가 최무수리(최숙빈)였으며, 최무수리는 4년 전에 페비되었던 인현왕후의 생일상을 차려놓고, 인현왕후 탄신경하를 드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미 오래전에 폐비되어 쫒겨났던 과거의 상전을 잊지못하고 지극정성으로 모시는 최무수리(최숙빈)의 가륵한 마음에 크게 감동받았던 숙종은 최무수리(최숙빈)에게 성은을 내리고 그녀를 숙원으로 책봉하게 된다.
이때가 1693년으로 숙종의 나이가 33살, 최무수리(최숙빈)의 나이가 24살이었고, 최무수리는 나이 7살에 궁궐로 들어와서 침방나인, 무수리등 힘든 궁녀생활 끝에, 전격적으로 왕의 성은을 입어서 후궁이 되었던 것이다.
왕비의 자리에서 쫒겨났던 자신의 상전을 끝까지 모시려했던 최무수리(최숙빈)의 갸륵한 마음이 하늘에 전해진 것은 아닐까?
그리고 최무수리가 숙종의 후궁이 된 지, 1년 만에 숙종은 남인세력들을 숙청하고 다시 서인세력들을 권력의 중심부로 등용했다. 이 시기에 인현왕후도 다시 궁궐로 들어오게 되었고, 왕비로 다시 복귀하게 된다.
남인정권에서 다시 서인정권으로 정권교체, 그리고 인현왕후의 복권이 최무수리(최숙빈)가 숙종의 후궁이 된 1년 후에 이뤄지게 되는데, 아무래도 최숙빈이 자신이 과거에 모셨던 인현왕후의 복권에 이루지도록 숙종을 많이 설득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이 가능하다.
최무수리는 숙원을 거쳐서 왕자(영조)를 낳은 후에는 숙희, 그리고 귀인을 거쳐서 빈의 자리에까지 올라갔다. 최무수리는 나중에 왕비 다음으로 가장 높은 벼슬인 빈의 자리까지 승진했는데, 그녀의 시호 ‘숙’을 붙여서 최숙빈이라고 부르게 된다.
드라마 ‘대박’에서 최숙빈이 유부녀였다는 것은 완전 가짜이며, 숙종실록의 기록에 분명히 최무수리(최숙빈)은 7살 때부터 궁궐에 입궁해서 궁녀로 살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SBS가 극의 재미를 더하기 위해서 무리하게 픽션을 가미한 것이다.
궁궐로 다시 복귀한 인현왕후는 5년 뒤에 끔찍한 질병에 걸려서 병석에 눕게된다. 폐서인 되어 사가에 유폐되었던 5년 동안 끔찍한 고생을 했던 인현왕후는 몸이 많이 약해진 나머지, 병을 앓아 눕게된 것이다.
온몸에 종기가 나고 열이 나서 몸을 움직이기도 힘든 질병에 걸린 인현왕후의 와병으로 인해서, 숙종도 매우 안타까운 마음을 갖고있었다고 한다.
결국 1701년 인현왕후가 병환을 이기지못하고 숨을 거두게 되자, 온나라가 시름에 빠져있을 무렵에, 최숙빈은 인형 하나를 갖고 숙종을 찾아가 몰래 고변을 하게된다.
그인형은 다름아닌 장희빈의 별당에서 나온 ‘저주인형’이라고 하며, 최숙빈은 숙종에게 장희빈이 신당을 차려놓고, 매일같이 인현왕후를 저주해왔다고 고변했다고 한다. 그리고 인현왕후를 저주했던 증거로 저주인형을 보여준 것이다.
즉, 인현왕후가 큰 병에 걸려 사망하게 된 것은, 바로 장희빈의 저주 때문이라고 최숙빈은 숙종에게 고해바친 것이다. 이와같은 최숙빈의 밀고로 인해서, 장희빈은 인현왕후를 저주했다는 죄목으로 사약을 받고 목숨을 잃게된다.
세자까지 낳고 기세등등했던 장희빈은 한때 인현왕후를 모셨던 궁녀출신인 최숙빈의 계략 때문에 죽음을 당하게된 것이다. 실제로 숙종실록의 기록에는 최숙빈이 장희빈의 행위(저주행위)를 숙종에게 몰래 고해바쳤다는 기록이 나와있다고 한다.
그럼 진짜로 장희빈이 인현왕후를 저주했던 것일까?
장희빈이 신당을 차려놓고 기도를 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장희빈이 차려놓은 신당은 병에 걸렸던 세자(경종)의 병을 낫게하기 위해서라는 또다른 기록이 남아있다.
원래 신당을 차리는 행위를 엄격히 금지했던 유교주의 국가인 조선시대에서 장희빈이 세자의 병을 낫게하기 위해서 만든 신당일지라도, 새로운 연적으로 부상한 최숙빈에게는 좋은 모함거리가 되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또한 다시 권력을 장악한 서인세력(노론)은 최숙빈과 연대를 해서 과거 서인사람들에게 많은 피해를 입혔던 원수나 다름없던 장희빈에 대한 복수를 하기위해 ‘저주사건’ 만큼 좋은 빌미는 없었을 것이다.
장희빈의 죽음은 서인세력과 최숙빈의 이해가 맞아떨어져서, 두세력간의 연대를 통해서 만들어진 결과물이라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장희빈이 최숙빈의 고변처럼, 인현왕후를 저주했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가 없다. 장희빈이 인현왕후를 저주했다는 기록 또한 숙종실록 등 정사의 기록에는 없고, 다만 야사나 소설에만 나와있는 내용이다.
숙종실록 35권의 기록에는 장희빈은 나라와 세자를 위해서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으며, 숙종은 장희빈의 장례식을 후하게 치러줬다고 기록되어 있다.
장희빈은 소설 ‘인현왕후전’에 나와있는 것처럼, 사약을 세 번이나 거절하는 등 죽지않으려고 발악을 한 것은 사실이 아니며, 오히려 세자의 모후로써 아주 품위있게 그리고 자발적으로 죽음을 선택했던 것이다.
알려진 것과 다르게 장희빈은 자신의 아들 세자의 장래를 위해서, 스스로 자결을 했던 것이다.
이렇게 깔끔하게 생을 마감했던 장희빈이 후대의 노론세력들에 의해서 마치 요부나 악녀같은 모습으로 왜곡된 것이 안타깝기만 하다.
또한 인현왕후도 실제의 모습은 우리에게 알려진 것처럼 완벽한 인품을 가진 천사의 모습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인현왕후는 여염집 여자들처럼 질투를 심하게 했으며, 연적인 장희빈에 대해 중상모략도 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자신의 남편이 다른 여자와 매일같이 잠자리를 같는 데, 질투를 하지않을 여자가 이세상에 어디 있는가? 사랑하기 때문에 질투하는 것인데, 만일 정말로 질투를 하지않는 여자가 있다면 그것은 그 남편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증거다.
숙종실록의 기록처럼 인현왕후가 장희빈에 대해 심한 질투를 하고 모략까지 했다고 해서, 인현왕후가 잘못했다고 생각되진 않는다. 그것은 여자로서 당연히 할 수 있는 권리라고 본다.
잘못한 사람은 인현왕후가 아니라, 바로 숙종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는 왕비와 후궁을 여러명 거느린 상태에서 자기 한사람만 바라보며 평생을 살아가는 여인들을 골고루 사랑해야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왕비와 모든 후궁들에게 고르고 균형감 있는 사랑을 배풀었어야할 숙종이 장희빈 한여인에게만 완전 빠져서, 그녀에게만 편중된 사랑을 베푼 것이 잘못인 것이다.
장희빈도 피해자이고 인현왕후도 피해자라고 할 수 있으며, 승자는 숙종과 서인세력들이라고 할 수 있다. 숙종은 인현왕후와 장희빈을 적절히 이용해서 정치세력들을 바꾸는 데에 사용했다고 할 수 있다.
서인세력도 처음에는 인현왕후를, 나중에는 최숙빈을 이용해서 자신들의 정치적 기반을 확보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리고 또한명의 승자는 바로 최무수리(최숙빈)이다. 왕비전에서 물을 길어나르던 일개 무수리였던 그녀는 나중에 왕의 후궁으로 발탁이 되었고, 자신의 최대의 위협인물인 장희빈을 제거하는 데 성공했으며, 자신의 아들(영조)이 왕위에까지 올랐으니, 최후의 승리를 거둔 셈이다.
인현왕후 초상화
그렇지만, 이러한 모든 것이 최무수리(최숙빈)가 의도했다고는 보여지지 않는다. 최무수리(최숙빈)는 그 시대에 맞게 자신의 역할에 충실했던 것이며, 그녀가 얻었던 모든 것들은 그녀가 열심히 살아가면서 저절로 따라왔던 것이다.
최숙빈은 인현왕후와 장희빈이 죽은 후 17년을 더 살면서, 정1품 빈으로까지 승진하면서 복락을 누렸지만, 자신의 아들인 영조가 왕이 되기 4년 전에 지병으로 사망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