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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6.04.13 ‘어메이징스토리’ 연산군 폐위와 못생긴 장녹수 얼굴, 죽음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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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메이징스토리 싸인' 143, 연산군을 홀린 장녹수의 얼굴외모, 최후

 

 

 

 

조선시대에 가장 흉악한 폭군과 가장 악독한 요부로 불리워졌던 두사람이 있는데, 바로 연산군과 장녹수다.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큰 페악을 저질렀던 폭군 연산군은 재위 당시 수많은 신료들을 학살하고, 기생들의 숲에 빠져 주지육림을 일삼았고, 백성들의 토지를 수탈하고 수백명의 무고한 사람들을 죽인 가장 잔인무도한 군주라는 타이틀을 안고 있는 임금이다.

 

그런데 그렇게 포악한 연산군 뒤에서 연산군의 마음을 사로잡으며 국정을 자기뜻대로 농락했던 후궁 장녹수가 있다.

연산군은 재위기간 동안 장녹수를 대단히 총애하였다고 알려져있는데, 장녹수의 어떤 부분이 포악하기 그지없던 연산군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것일까?

 

   

장녹수의 외모는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그리 아름다운 외모가 아니라고 한다.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장녹수가 연산군의 마음을 사로잡았을 정도로 대단한 미모를 갖추었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조선왕조실록의 연산군편에 따르면, 장녹수의 외모는 중간수준을 넘지 못했다고 한다.

 

조선왕조실록의 연산8년 일지를 보면, ‘장녹수의 얼굴은 중인 정도를 넘지못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에는 장녹수가 미인이 아니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그렇다면 미인이 아닌 장녹수가 어떻게 연산군을 사로잡을 수가 있었을까?

 

장녹수는 첩의 자식으로 태어나서, 가난 때문에 13살의 어린 나이에 몸종으로 팔려갔다고 한다. 실제로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에도 장녹수는 집이 매우 가난하여 몸을 팔아서 생활을 해왔고, 시집도 여러번이나 갔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장녹수는 연산군을 만나기 전에는 가난하고 신분이 미천했던 애까지 딸린 기생의 신분이었다.

 

 

장녹수는 가난한 살림에다 아이까지 낳아서 생활이 어려워지자, 본격적으로 가무를 배워서 기생의 길을 갔다고 한다. 그런데 이렇게 애까지 딸린 미천한 기생출신인 장녹수가 어떻게 왕의 여자가 될 수 있었을까?

 

장녹수는 제안대군의 몸종으로 있었는데, 어느날 제안대군의 집에 찾아왔던 연산군의 술자리에서 술시중을 들게 되었으며 그 자리에서 연산군의 눈에 띄게 되었으며, 이때부터 연산군에게 선택되어서 궁궐로 들어가서 궁녀가 되었다고 한다.

별로 미인의 외모도 아니고 몸종으로 있던 장녹수가 연산군의 눈에 띄었던 가장 큰 이유는 그녀가 가무에 아주 뛰어난 재주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결혼 두 번의 경력에다가 애까지 딸려있던 평범한 외모의 장녹수는 자신의 장기인 춤과 노래로 연산군을 완전히 넋이 나가게 만들었던 것이다.

주색잡기와 풍류를 무척이나 좋아했던 연산군은 춤과 노래를 잘했던 장녹수에게 마음을 빼앗길 수 밖에 없었던 것이고, 연산군은 장녹수를 궁궐로 데려가서 연산군의 9번째 후궁이 되었는데, 3품의 숙용에 책봉하는 파격적인 대우를 해주었다고 한다.

 

요즘 말로 치자면, 노래와 춤을 잘했던 신세대걸그룹의 멤버에게 왕이 완전히 마음을 빼앗기고 만 것이다. 그런데 장녹수는 연산군보다도 10살이나 더 많았기 때문에 30대의 춤 잘추는 걸그룹 맴버라고 할 수 있다.

 

풍류와 주색잡기를 좋아하는 연산군과 왠만한 기생 빰칠 정도로 탁월한 춤솜씨, 노래솜씨를 지녔던 장녹수는 한마디로 말해 최상의 궁합을 갖추었다고 할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 연산군편에는 장녹수는 노래를 잘해서 입술을 움직이지 않아도 소리가 대단히 맑아서 들을 만했으며, 왕이 듣고 크게 기뻐했다고 장녹수의 뛰어난 가무실력에 연산군이 매우 기뻐한 사실을 기록해놓고 있다.

 

또한 장녹수는 여자특유의 애교와 재치, 입담, 그리고 남자의 마음을 녹일 줄 아는 아첨과 교태로 연산군의 마음을 완전 사로잡았다고 한다.

장녹수는 연산군이 원하는 말을 적절히 구사할 줄 아는 센스가 있었으며, 상황에 맞게 연산군의 비위를 잘 맞추었다고 한다. 그래서 더욱 연산군은 장녹수를 총애하게 된 것이다.

 

어느날 연산군이 술을 먹고 있던 자리에서 예조판서 이세좌가 연산군의 소매에 술을 흘리는 실수를 범하고 말았는데, 이 자리에 함께 있던 장녹수는 이세좌가 연산군의 어머니 폐비윤씨의 사사에 찬성했던 전력을 고자질했다고 하며, 이에 크게 분노한 연산군은 이세좌를 참수하라는 명을 내리게 된다.

 

 

연산군의 총애가 깊어지자, 더욱 기고 만장했던 장녹수는 연산군의 총애를 기화로 연산군을 뒤에서 쥐락펴락하면서 국정을 농단하기에 이른다.

또한 어느 늦은 밤에 연산군과 장녹수의 술상을 날라왔던 기생 옥지화가 실수로 장녹수의 치마를 밟은 바람로 장녹수의 엄청난 분노를 사게되고, 가혹한 고문을 당한 끝에 참수되는 일이 일어났다고 한다.

 

실수로 치마를 밟았다고 해서, 심한 고문을 당하고 목이 효수되는 처벌을 받았다는 것은, 이 당시 장녹수의 위세가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연산군이 궐밖에서 데려와서 궁녀로 삼았던 최전향과 수근비는 한때 연산군이 곁에 끼고 이뻐할 정도로 총애하였는데, 얼굴이 너무 이쁘다는 이유로 장녹수의 심한 투기를 받게되며, 장녹수의 간계로 인해서 연산군에게 버림받게 되고, 심지어 강계로 유배당하고 만다.

 

 

너무 이쁘다는 이유로 - 실제로는 장녹수보다 더 예쁘다는 이유로 - 장녹수의 심기를 건드렸기 때문에, 최전향과 수근비는 질투를 했다는 거짓죄명이 씌워져서 장 80대를 맞고 유배를 가게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또다시 분이 안풀린 장녹수의 간계에 걸려서 이번에는 역적으로까지 몰려서 능지처참을 당하게 되고, 절단된 사지는 저작거리에 버려졌다고 한다폭군 연산군의 애첩이었던 장녹수의 위세와 권위가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알 수 있는 부분이다.

단지 장녹수보다 더 예쁘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장녹수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어서, 역적으로까지 몰려서 끔직한 죽음을 당했던 것이다.

 

연산군은 무오사화, 갑자사화를 일으켜서 수백명의 신하들을 학살했는데, 연산군의 후궁 장녹수 역시 연산군 못지않게 엄청난 폐악을 저절렀던 것이다.

 

연산군이 장녹수의 치맛폭에 쌓여서 매일같이 주색잡기에 빠져서 지내고 정사를 돌보지 않자, 연산군의 충신인 환관 김처선이 연산군에게 간언을 했다고 한다.

김처선은 연산군에게 장녹수 때문에 임금이 정사를 돌보지 않는다고 신하들의 불만이 높다고 말하면서, 장녹수를 내치고 백성들을 위한 바른 정치를 할 것을 충언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러한 김처선의 충언은 장녹수의 귀에 들어가게 되고, 간특한 장녹수는 연산군이 보는 앞에서 마치 자결할 것처럼 거짓 연극을 꾸미고는, 연산군을 조종해서 충신 김처선을 처형하게끔 만들어버린다.

연산군을 바르게 뫼시고자 했던 환관 김처선은 장녹수의 계략으로 인해 연산군으로부터 죽임을 당했으며, 그의 양아들 이공신마저도 처형을 당했다고 한다.

 

장녹수의 말 한마디에 대신들의 목숨이 왔다갔다 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후에도 연산군과 장녹수의 폐악을 계속 진행되었으며, 조금이라도 연산군과 장녹수의 마음을 거스리기라도 하면, 신하이든 후궁이던 여지없이 목숨이 날아가고 말았던 것이다.

 

또한 연산군은 궁궐에 흥청을 두고 3천명의 기생들을 끌어들여서 그곳에서 온갖 향락생활을 즐겼다고 한다. 아니 기생 3천명을 수용할 정도의 크기라면 얼마나 큰 장소인지, 상상하기가 어려울 정도다.

백성들은 이것을 가리켜서 흥청망청이라는 말을 하면서, 연산군의 방탕한 생활을 비꼬았다고 한다.

 

오늘날 돈과 재물을 물쓰듯 엄청나게 낭비한다는 의미의 사자성어인 흥청망청이라는 단어는 바로 연산군이 만든 향락의 장소 흥청에서 유래된 말이라고 한다.

 

 

장녹수가 포악한 연산군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었던 비결은 어머니를 그리워했던 연산군에게 진한 모성애를 느끼게 해주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자신의 친어머니의 정을 그리워하면서 살았던 연산군에게 장녹수는 연산군의 어릴 적 이름을 부르기도 하면서, 어머니의 애정에 굶주려있던 연산군에게 모성애를 듬뿍 채워주었다고 한다.

 

억울하게 죽임을 당했던 어머니 폐비윤씨를 그리워했던 연산군의 굶주린 모정을 장녹수가 대신 채워주면서, 연산군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끝을 모르고 온갖 폐악을 저질렀던 연산군은 반정쿠테타가 일어나기 일주일 전에 평소처럼 술잔치를 즐기던 자리에서 인생은 풀잎에 맺힌 이슬과 같아서 함께 있을 때가 많지 않을 것이라는 내용의 시를 읊었다고 한다.

 

연산군은 장녹수와 전비에게 지금은 태평한 시절이지만, 만약 변고가 일어난다면, 너희를 내가 지켜주지 못하겠구나하고 말하면서 같이 울었다고 한다.

변고를 언급했던 연산군은 자신의 미래를 예측했던 것일까?

 

이렇게 연산군이 변고를 언급하고 일주일이 지난 후에, 정말로 1506년에 박원종, 유자광, 유순정 등 대신들이 주도한 반정쿠테타이 일어나게 되고, 연산군은 폐위되고 중종이 새롭게 왕위에 오르게 된다.

 

박원종 등 반정세력들에 의해서 폐위된 연산군은 강화도로 유배를 가서 유배생활을 하게되며, 몇 달 뒤에 병사하고 마는데, 일설에는 박원종의 계략으로 독살 당했다는 소문도 있다.

 

 

그리고 연산군을 뒤에서 조종해서 온갖 악덕한 짓을 저질렀던 장녹수는 연산군의 다른 후궁인 전비, 백견과 함께 반정세력들이 보는 앞에서 참수형을 당하고 말았다고 한다.

장녹수가 참수당하고 난 후, 장녹수시신 앞으로 백성들이 몰려들었다고 하며, 백성들은 나라의 고혈이 모두 장녹수의 음부로 빨려들어갔다고 외치면서 장녹수 시신위로 돌을 던졌다고 하며, 순식간에 큰 돌무덤이 생겼을 정도라고 한다.

 

재위기간 동안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던 연산군은 어머니인 폐비윤씨의 억울한 죽음을 알게 된 후, 어머니의 복수를 하기 위해서 수많은 대신들을 죽이는등 포악한 정치를 행했던 폭군이었다.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서, 또한 자신의 어머니에 대한 복수를 하기 위해서, 능지처참, 부관참시 등 듣기만해도 끔찍할 정도로 살상을 많이 저질렀으며, 장녹수는 연산군의 총애를 계속 받기위해서 옆에서 연산군의 악행을 부추키는 등 악독한 짓을 많이 했다.

 

연산군은 무오사화, 갑자사화 때 수많은 사람파, 훈구파대신들을 참살하고 숙청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이 등용하고 신임해 주었던 측근 박원종과 유자광등 소위 왕당파 신하들에 의해서 거꾸로 왕위에서 쫒겨나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그것은 연산군이 너무 오랫동안 패덕한 정치를 많이 해옴으로써, 신하들에게 왕으로서의 도덕적 귄위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연산군은 자신의 정치이상을 실현하기 위해서 유교적인 덕치보다는 힘과 칼을무차별적으로 휘둘러 댔다.

연산군은 결국 칼로 일어난 사람은 반드시 칼에 의해서 멸망한다는 성현의 말 그대로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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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프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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