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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5.10.03 삼국유사 ‘단군신화’ 이야기. 고조선의 국조 단군왕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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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조선 대신 한씨조선, 단군조선의 실체와 근거, 삼국사기 내용

 

 

 

 

103일은 개천철(開天節)’로서 우리나라의 시조 단군이 우리나라를 처음으로 개국한 날을 기념하기 위해 만든 개국기념일이다. 역사가들이 전하기를 우리나라의 국조인 단군왕검이 원년 103일날에 최초로 단군조선(고조선)을 개국했다고 알려지면서, 국가적으로 단군의 국가제정일인 103일을 기념하기 위해서 이날을 하늘이 열린 날이라는 의미로 개천절을 정해서 기념해오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시조라고 불리우는 단군은 진짜 실재한 역사적 인물일까, 아니면 단지 신화속의 인물일까?

그리고 단군이 개국했다는 단군조선은 실재한 역사일까, 아니면 신화로만 존재하는 허구의 역사일까?

 

우리나라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과 단군이 개국했다는 단군조선은 별개의 개념이다. 사학자들이 우리나라 고조선을 3분등분해서 단군조선 - 기자조선 - 위만조선으로 구분해놓고 있는데, 3단계의 고조선 중에서 역사적 실체가 인정되고 있는 고조선은 마지막단계인 위만조선뿐이다.

 

고조선의 첫단계인 단군조선은 단군신화로 알려지면서 강단사학계에서는 단군조선의 그 역사적 실체가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상태이며, 고조선의 두 번째단계인 기자조선(箕子朝鮮)은 복생의 상서대전사마천의 사기반고의 한서등 중국사서에 기록되어 있는 등 사료적 근거는 갖추고 있지만, 기자가 중국 은나라 사람인 관계로 우리나라 민족사학자들에게 배척을 당하고 인정받지 못하고있는 형편이다.

 

우리나라 민족사학계에서는 중국 은나라 신하인 기자가 세운 기자조선을 부정하고 있고, 기자 대신 한씨가 세운 한씨조선으로 대체해서 불리우고 있다.

 

단군조선 개국시기 - 기원전 2,333~

기자조선 개국시기 - 기원전 1,100~

위만조선 개국시기 - 기원전 194~ 기원전 108

   

그러므로 종래에 인정받아왔던 3단계의 고조선사 중에서 기자조선이 아닌 한씨조선과 위만조선만이 역사적 사실로서 인정받고 있는 셈이다.

 

기자조선을 개국한 기자(箕子)는 중국의 정사인 사마대전’ ‘사기’ ‘한서’ ‘삼국지등에 기록된 역사적 인물인 것은 사실이지만, 은나라가 멸망한 후, 기자가 주나라의 동쪽땅 조선으로 망명한 뒤, 주나라 무왕으로부터 조선왕에 봉해짐으로써 조선왕으로 등극했다는 내용을 다룬 이들 중국사서들의 기자조선 내용만큼은 우리나라 민족사학자들이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고.

이러한 기자조선설은 중화사상에 입각해서 중국인들이 조작해낸 허구의 역사라고 주장이 현재의 대세를 이루고 있으며, 최근 학교교과서에도 기자조선을 빼놓고 있는 실정이다.

 

그런데 고려와 조선시대에서는 기자조선을 역사적 사실로 인정해왔으며, 기자를 조선의 국조로서 지배계층들과 많은 유학자들과 기자사당과 묘를 지어놓고 제사까지 지내왔다는 사실을 알고있는가?

 

현대의 민족사학자들이 기자조선을 한씨조선(韓氏朝鮮)이라고 바꿔부르는 것은 중국 잠부론(潛夫論)의 역사적 기록에 근거를 두고있기 때문이다.

후한시대에 왕부가 쓴 잠부론의 기록에 의하면, ‘주나라 선왕 때에 연나라 근처에 한후(韓侯)라는 세력(국가)이 있었으며, 한나라의 서쪽에서도 성씨를 한()이라고 하는등 세력을 떨쳤는데, 위만에게 망하여 바다를 건너갔다는 기록이 있다.

 

위만에게 패망해 달아난 왕은 바로 준왕(準王)이므로, 이 기록에서 언급한 한씨는 준왕과 동일한 혈통의 세력으로 볼 수 있기 때문에 준왕의 성씨가 한씨(韓氏)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위만에게 패망하여 왕위를 빼앗기고 달아난 준왕의 성씨는 기씨가 아니라 한씨(韓氏)라고 하는 새로운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그러므로 고려시대와 조선시대까지 오랫동안 민족의 국조라고 숭배되어왔던 기자조선과 기후는 역사적 실체로써 부정되고, 기자조선 대신 한씨조선이 더 큰 설득력을 갖고있는 것이다.

 

이제부터는 기자조선대신 한씨조선으로 바꿔 불러야할 것이다. 또 이당시 한씨성을 가진 준왕이 위만에게 패하여 바다를 건너 한반도 남쪽 땅에 도착해서 자신을 따라온 신하, 호위군사등을 중심으로 해서 새로운 국가를 건설했는데. 그 국가를 한(=마한)이라고 했으며. 자신을 스스로 한왕(韓王)이라고 칭했다는 기록도 있다.

 

, 위만에게 패망해 한반도 남쪽지역(전라도 익산부근)에 도착한 준왕(韓準, 韓王)은 자신의 성씨를 따서 자신을 한왕(韓王)이라고 칭했으며, 한왕(준왕)이 이곳에서 세운 국가는 자연스럽게 한()이라고 불렀으며, 한은 바로 마한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한왕(준왕)이 세운 한()으로부터 한반도 남부에 마한, 진한, 변한 등의 삼한(三韓)이 갈라져 나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결론을 내면 준왕의 성은 한씨(韓氏)라는 것과 준왕(한왕)이 한반도 남부로 내려와서 한이라는 국가를 세웠고, 준왕이 세운 한()은 나중에 삼한으로 나눠지게 된다.

그러므로 기원전에 한반도 남부에 존재했던 삼한(三韓)은 준왕(한왕)이 그 시조가 되는 것이며, 3개의 한이 모두 나라이름을 한()이라고 한 것은 바로 준왕(한왕)의 성씨 한()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한다.

 

기원전에 존재했던 한반도 남부지방의 삼한의 시조는 바로 위만에게 패망했던 준왕(한왕)이라는 것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 그리고 준왕의 성은 한()이라는 것도 또한 알아둘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나라 이름을 한국(韓國)이라고 부르는 원천이 된 것이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국명이 왜 한국인지, 그리고 한국의 기원이 어디에서 유래한 것이지를 미리 짚어본 것이다.

기자는 실존인물인 것은 맞지만, 기자가 세웠다는 기자조선은 고조선의 지역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고조선의 서쪽변방에 있었던 고조선의 속국 내지는 종속국가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당시 한반도북부와 만주를 점령하고 있었던 거대한 제국 고조선은 한()이라는 성씨를 지닌 왕들이 다스리고 있었으며, 기자조선은 고조선의 서쪽변방에 위치한 고조선의 작은 변방종속국이라고 유추해볼 수 있다.

중국 주나라의 동쪽이라면 그지역은 바로 오늘날의 화북지역이므로, 주나라의 도읍 서안(장안)에서 동쪽지역인 화북성부근으로 도망친 기자가 세운 나라 또한 중국 화북성일대에 있다고 보는 것이 일리에 맞다.

 

이렇게 해서 고조선의 3단계 국가중 기자조선과 위만조선의 역사적 실체는 한씨조선 - 위만조선으로 바뀌어서 그 역사적 실체를 인정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고조선의 첫단계의 국가인 단군조선의 실체는 어떻게 되는가?

이것이 가장 풀기 어려운 문제이며, 단군조선의 실체는 역사적 사료와 그 어떤 고학적 유물에서도 전혀 발견되지 않고 있다.

 

우리나라의 상징적인 시조로서 오랫동안 추앙받아왔던 단군과 단군조선은 과연 실재로 존재한 역사일까? 정말 대한민국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사항일 것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단군조선이 실존했었다는 객관적인 증거는 그 어디에도 없다.

역사적 사료(기록)을 보더라도 정사에는 단군이나 단군조선에 대한 기록이 없으며, 단지 단군조선은 야사에서만 간간히 언급되고 있을 뿐이다.

 

 

  단군과 환웅의 역사가 기록됐다고 주장하는 환단고기는 개연수라는 국수주의(미치광이 민족종교분자)가 쓴 개인문집일 뿐이며, 역사적 사실하고 아무 관련이 없으니, 절대로 환단고기를 읽지않는 것이 좋다. 환단고기는 단학과 대종교라는 종교에 빠진 광신자 개연수가 자신의 상상대로 쓴 100% 위서이기 때문에 언급할 가치조차 없다.

 

그리고 단군이나 단군조선에 관한 고고학적 증거물(유물, 유적)등도 전혀 나오지않고 있다. 북한의 평양에 있다는 단군사당은 김정일이 북한이 한반도에서 유일하게 정통성을 확보한 단군의 후손이라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서 만들어낸 조작된 분묘일 뿐이다.

 

현재 존재하는 우리나라 최고로 오래된 역사서는 삼국사기(삼국사기)’. 현재 우리나라 교과서에서 나오는 한국사의 내용은 모두 정사인 삼국사기에서 인용한 글들이다. , 삼국사기가 없었더라면, 현재 중고등학교에서 가르치는 역사책도 존재할 수 없다는 말이다.

 

 

삼국사기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가치높은 역사서일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고대국가와 가장 오래된 역사적 사실들을 알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정사라고 할 수 있다.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삼국유사도 있지만, 삼국유사는 정사가 아니라 개인이 쓴 야사이기 때문에 삼국사기보다는 사료적 가치가 훨씬 떨어지고 있다.

 

우리나라의 대부분의 역사책은 바로 이 삼국사기의 내용을 근거로 해서 쓰여지고 있다. 우리나라의 삼국시대와 상고사 역사는 삼국사기를 토대로 해서 쓰여진다.

 

삼국사기 집필을 주도했던 김부식

 

이렇게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사서인 삼국사기에 단군이나 단군조선에 대한 기록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정말 이상한 일이 아닐 수가 없다. 국가에서 최고관리인 시중을 중심으로해서 사관 10명이 위원회를 편성해서 오랫동안 연구해서 집필되었던 삼국사기에 가장 중요한 우리나라의 시조와 최초의 국가를 다루지않았다는 것이 정말 이상할 뿐이다.

 

삼국사기에는 고구려, 백제, 신라의 역사가 매우 구체적이고 객관적으로 시대별로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는 우리나라 삼국시대와 고대국가시대 및 그 이전의 시기를 기록한 책으로서는 최고의 가치를 지닌 책인데. 유감스럽게도 삼국사기의 내용에는 삼국과 부여의 내용은 나오지만, 고조선과 단군에 대해서는 그 어떤 기록도 나오지않고 있다.

 

삼국사기에 고조선에 대한 내용은 딱 한 줄만 나오는데, 박혁거세를 왕으로 옹립했던 경상도 계림지역의 5촌이 고조선의 유민(遺民)이라는 기록이 유일하다. 이기록을 보면 삼국사기에서도 고조선의 실체는 인정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렇지만 단군에 대한 기록은 전혀 없는데. 왜일까?

 

그런데 삼국사기보다도 140여년 후에 쓰여진 삼국유사에는 단군에 대한 기록이 나오는데 즉, ‘단군신화에 대한 기록이 그것이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단군신화내용은 한페이지 분량으로 극히 짧은 내용으로 되어있으며, ‘단군신화의 내용은 역사적인 내용이라기 보다는 민담이나 설화같은 황당한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기원후 1281년 고려 충렬왕때의 승려 일연이 쓴 삼국유사의 단군신화내용은 역사적 사실로 보기 힘든 매우 픽션 같은 황당한 내용으로 기록되어 있어서, 객관적인 입장에서 볼 때에는 이 단군신화내용을 역사적 사실로 인정하기가 곤란한 측면이 있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단군신화의 내용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 위서(북위의 위수가 쓴 책)에 이런 말이 있는데. 옛날 환인이 있었는데. 인간세계를 동경하였던 환인의 서자 환웅이 풍백, 운사, 우사와 무리 3천명을 거느리고 태백산(묘향산추정)의 신시(神市)로 내려와서 인간세계를 다스렸다.

 

환웅은 인간이 되기를 원했던 곰과 호랑이에게 마늘과 쑥을 먹고 100일을 버텨내면 인간이 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는데, 곰이 마늘과 쑥을 먹고 21일을 버터내어 여자가 되었으며 그녀가 웅녀이다.

 

환웅은 잠시 인간으로 탈바꿈해서 혼인을 꿈꾸는 웅녀와 혼인함으로써 단군왕검이 태어났으며, 단군왕검은 중국 요임금시대인 BC 2,333년에 평양성에 도읍해서 조선을 개국했으며, 다시 도읍을 백악산의 아사달로 옮겼으며, 이곳에서 1,500년동안 조선을 다스렸다.

 

그런데 중국 주나라시대에 무왕이 기자를 조선의 왕으로 봉하니, 단군은 장경당으로 옮겼다가, 나중에 다시 아사달로 돌아와서 1,908세까지 살다가 산신이 되었다.

 

여기까지가 삼국유사에 나오는 단군신화에 대한 내용인데, 환인의 아들 환웅이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와 인간세계를 다스린다는 내용과 환웅이 곰이 변한 웅녀와 혼인해서 단군을 낳았으며, 단군이 조선을 개국하고 1,500년 동안 다스렸다는 내용으로 함축해볼 수 있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단군관련 내용이 너무나 황당하지 않는가? 곰이 인간을 낳았느니, 단군이 왕이 된 후 1500년간 다스렸다느니, 기자에게 쫒겨났다가 다시 돌아와 1900년까지 살았다느니, 이러한 황당한 내용을 어떻게 믿을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삼국유사에 언급된 단군신화의 근거인 위서라는 책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삼국유사가 단군관련 내용의 근거로 든 위서라는 책 자체가 중국에 존재하지 않고 있으며, 비슷한 이름의 책으로는 삼국지의 위지동이전과 위략이라는 책이 있는데, 이들 책에도 단군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다.

 

승려 일연이 단군관련 내용을 쓸 때에 보고쓴 책은 현존하지 않기 때문에, 삼국유사의 단군관련 내용은 아마 평양지방에서 민담으로 떠돌던 전설같은 이야기를 승려 일연이 전해듣고 삼국유사 안에 끼워넣은 것으로 보여진다.

 

삼국유사를 집필했던 승려 일연은 두명의 제자를 데리고 고려시대에 전국의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면서 수많은 민담과 괴담, 불교에 관련된 설화등을 채집해왔고, 이렇게 민간에서 채집한 민담, 설화 등을 엮어서 만든 책이 바로 삼국유사다.

 

삼국유사

 

삼국유사는 엄밀히 말해서 역사서가 아니고 불교인의 입장에서 쓴 불교적 체험이나 불교적 민담설화이다. 불교나 스님들의 체험담과 민담내용이 거의 80%를 차지하고 있고 역사 관련내용은 20% 정도에 불과하다.

 

야사인 삼국유사에 매우 황당한 내용으로 기록된 단군신화는 가장 오래된 정사인 삼국사기에는 전혀 기록되지 않았다.

삼국사기는 고려 인종때 문하시중인 김부식이 10여명의 사관과 함께 집필했던 객관성이 높고 구체적인 내용이 들어간 우리나라 고대국가시대를 기록한 가장 수준 높은 역사서이다.

 

그런데 이렇게 가치높은 사서인 삼국사기에서 삼국유사에선 다루었던 단군관련 내용을 넣지않은 것은 단군신화의 내용이 너무 황당하기 짝이 없으며, 객관성이 떨어지고 역사적인 사실로 인정할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삼국사기를 집필했던 김부식이나 10명의 사관들은 모두 당대 최고의 학식높은 유학자들이었으며, 최고의 인텔리층이었기 때문에 단군에 관한 민간에 떠돌던 이야기를 분명 알고 있었을 것이다.

 

고조선의 유물인 청동장식 2륜마차

 

그런데 단군신화의 내용이 객관적인 과거의 근거나 기록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이 황당한 내용의 단군관련 내용을 정사인 삼국사기에 의도적으로 포함시키지 않았던 것이다.

, 김부식은 단군신화를 역사적 사실로 볼 수 있는 근거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삼국사기에 포함시키지 않았으며, 역사적 사실로 인정하지도 않았던 것이다.

 

필자의 추측으로는 단군신화는 중국이나 고대 우리나라에서 사서에 기록되어 전해진 내용이 아니라, 평양이나 한반도 북부지방에 민간에서 민담설화로 떠돌던 이야기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본다.

, 한반도 북부지방의 촌로들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내려왔던 구전설화로서 전설따라 삼천리 같은 이야기로 이해하면 된다.

 

이렇게 민간에서 재미있는 민담이나 설화로 떠돌아다니던 근거가 희박한 단군 관련 내용을 고려시대 최고의 석학이었던 김부식이나 사관들이 역사적 사실로 인정할 수는 결코 없는 일이었고, 또한 김부식과 10명의 사관들은 삼국사기를 집필할 때 가장 객관적인 사실만을 기록하기 위해서 중국과 전국의 관청등을 오가면서 수많은 과거의 사서들을 수집하고 연구를 많이 했었다고 한다.

 

삼국사기의 서문에도 분명히 나와있다. 삼국사기의 내용은 황당한 설화들은 제외하고 중국과 우리나라의 고대사서들에 기록되어 있는 객관적이고 정확한 역사적 사실만을 엄선해서 기록한다고 말이다.

 

삼국사기에 유일하게 단군관련 기록이 딱 한줄 나온다.

촌로들이 이르기를, 평양은 옛날에 선인왕검이라는 자의 도읍지였었다고 한다

이 기록이 단군에 관한 삼국사기의 유일한 기록이다.

 

단군이 이기록을 봤다면 얼마나 슬프고 원통했겠는가? 한나라의 국조인 자신을 이렇게 홀대히 취급했으니 말이다.

딱 한줄, 그것도 단군이라는 표현대신 선인왕검이라고 표현하고, 조선이라는 나라이름도 전혀 없고 단지 평양이 선인(단군)의 도읍지라는 표현이 전부이다.

 

그리고 이같은 단군관련 내용을 중국이나 우리나라의 사서가 아닌 시골의 노인내들한테서 구전으로 전해들었다고 한다.

이것으로보면 삼국사기를 집필했던 김부식과 사관들은 분명히 단군신화의 내용을 알고있었다고 본다. 그렇지만 너무 유치하고 황당해서 삼국사기에 기록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후 단군관련 내용은 제왕운기, 조선시대의 세종실록지리지, 동국통감, 응제시주 같은 책에 실리게 되는데, 이러한 기록들은 전부 고려시대의 삼국유사를 보고 그대로 베껴쓴 것이기 때문에 논할 가치가 전혀 없다.

 

 

 

단군신화는 과거에 오랫동안 한반도 북부지방과 만주의 일부지역에서 입에서 입으로 전해내려온 설화이야기이다.

이러한 단군신화가 실재한 역사라기보다는 상고시대에 국가라는 연합체를 세우기 위해서 특정한 정치지도자가 정치적 술사로 사용했던 상징물이 아닌가 생각된다.

 

정치적 이합집산이 심했던 상고시대의 부족국가시대에 여러 이질적인 부족들을 통합하고 한 대 뭉치게 하기위해서 단군이라는 천손집단이라는 상징물을 만들어서 정치적 정통성을 확보하고, 손쉽게 부족들을 복속시켰던 것으로 판단해볼 수 있다.

단군이라는 명칭에는 천손 또는 천계집단이라는 철학이 담겨져 있다. ‘단군이라는 명칭에는 하늘의 황제의 혈통을 이어받은 정통성있는 왕권이라는 뉘앙스가 진하게 담겨져있다.

 

정치적 통합체인 국가가 처음으로 성립하던 시기인 상고시대와 고대국가시대에 서로 세력을 다투며 분열되었던 이질적인 여러 부족들을 하나로 통합시키기 위해서는 정치적인 구심점이 필요했으며, ‘단군이라는 상징물이 여러부족들을 결합시키고 한 대 뭉치게 만드는 정치적 구심체역할 내지는 민족적 통합물의 상징으로 사용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만주지역의 여러 이질적인 부족들을 통합시키고 거대한 민족국가를 세우길 원했던 특정한 정치세력의 수장이 단군이라는 키워드를 내세워서 자신이 하늘의 혈통을 이어받은 왕권의 보유자로서 행세하였고, 이러한 정치적 상징물이 성격이 서로 다른 여러부족들을 통합시키고 하나로 뭉치게하는 데에 큰 역할을 할 수 있었다고 본다.

그렇게 해서 고조선과 같은 특정한 민족국가가 형성하게 된 것은 아닐까?

 

, 환인, 환웅, 단군이라는 키워드는 실제로 존재했던 역사적인 인물이 아니라, 수십개의 부족집단들이 서로 세력을 다튔던 시기에 이들 부족들을 하나로 통합시켜 연합국가를 만들기 위해서 사용되었던 정치적인 상징물이자 민족 통합의 키워드였다고 볼 수 있다.

 

천신, 천제의 혈통을 이어받은 단군이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부족의 군장이 여러 부족들을 하늘의 혈통을 이어받은 왕권이라는 귄위를 사용해서 손쉽게 통합시키고 복속시켜나갔던 것이다. 하늘의 혈통이라는 것은 왕권의 정통성을 높여주기 때문이다.

 

이러한 정치적 상징물이나 수단을 사용해서 실제로 여러 부족들을 통합해서 부족연맹체인 국가를 성립시켰던 고대국가들이 꽤 많이 있다.

부여, 고구려 또한 천손사상을 퍼뜨려서 다른 이질적인 부족들을 쉽게 통합시켰던 것이며, 그 시발점이 바로 단군인 것이다.

 

따라서 단군은 실존인물이라기 보다는 만주지역의 한쪽 귀퉁이를 다스리면서 주변의 여러 부족들을 통합해나갔던 부족연맹체의 수장이나 군장명칭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상고시대에 좀 더 강한 부족장이 천손사상을 상징하는 단군이라는 명칭을 사용해서 하늘의 혈통을 이어받은 왕권으로서 행세하면 손쉽게 주변의 부족들을 복속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단군은 개인의 이름이 아니라, 군장이나 부족장을 의미하는 명칭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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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프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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