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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5.07.01 역도산 대 최배달의 대결, 기무라 경기 동영상, 사망원인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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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프로레슬러의 제왕 역도산 대 최영의의 대결, 사망이유, 역도산 대 기무라 

 

 

역도산(김신락) 19241114- 19631215

 

 

역도산! 한국인들이 가장 자랑스러워하는 위대한 프로레슬러로서 일본 프로레스링을 창설한 전설적인 인물이다.

한국 프로레슬링의 제왕인 김일의 스승이며 유명한 일본 프로레슬러 안토니오 이노끼의 스승이다.

 

 

역도산은 함경남도 출신으로 일본으로 도래해서 스모선수 생활을 거쳐서 1953년 일본프로레슬링협회를 창설하고 미국등 서구의 강력한 레슬링선수들을 제압하고 세계챔피언으로 우뚝 솟으며 일본인들로부터 엄청난 환호와 열광을 받으며 50년대의 일본프로레슬링계를 이끌어갔던 전설적인 인물이다.

 

 

역도산이 우리나라에서보다 일본에서 더욱 영웅적인 인물로 존경받았던 것은 그가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철저히 숨기면서 활동했기 때문이다.

역도산은 프로레슬링의 불모지나 다름없었던 1951년 당시의 일본에 미국의 프로레슬링을 도입했으며 미국의 샤프형제를 불러들여 번쩍이는 가라데촙으로 쓰러뜨리는 등 미국과 서구의 기라성같은 뛰어난 선수들을 모두 제압하고 세계챔피언에 당당히 오름으로써 

2차세계대전의 패전으로 열등감과 자괴감에 빠져있던 일본인들에게 새로운 희망의 상징으로 떠올랐으며, 패전이후 실의에 빠져있던 일본인들에게는 커다란 활력소같은 존재감이 되었다.

 

역도산은 1951년 프로레슬링에 입문하여 닥치는 대로 상대선수들을 쓰러뜨리면서 승승장구하였고 마침내 무패의 세계최강이라고 일컬어지는 루테즈를 제압하고 WWA 헤비급세계챔피언에 오름으로서 그의 파워와 실력이 결코 허언이 아니었음을 입증했다.

 

전성기시절 역도산 사진

 

당시 역도산은 강력한 가라데촙으로 자신보다 키가 훨씬 큰 미국의 거인들을 통쾌하게 쓰러뜨리는 모습을 선보여서 프로레슬링의 인기를 크게 높여놓았고 강인한 체력과 강철같은 가라데촙으로 수많은 서양의 거구선수들을 제압해온 역도산은 일본스포츠계의 영웅이자 살아있는 신화 그자체였다.

 

 

역도산과 최배달(최영의)의 갈등과 대립

 

이렇게 1950년대에 재일한국인인데도 불구하고 일본에서 국민적 영웅으로 높은 인기와 명성을 누리던 역도산이 동시대를 살았던 또다른 한국인출신의 영웅인 최영의의 도전을 받게 된다.

 

최배달로 더 많이 알려진 최영의가 누구인가? 실전가라데의 명수로 당시 일본가라데를 포함한 일본무도계에서 최고의 실전파이터가 아니던가!

최배달은 일본의 전국공수도대회에서 우승한 후 일본가라데의 형식적인 대결에 회의를 느끼고 스스로 일본전국을 떠돌면서 가라데고수들과 실전대결을 펼쳤던 바로 그사람이다.

 

최영의는 일본의 내노라하는 무도계 실력자들을 찾아가서 실전대결을 펼쳐서 모두 제압했으며, 그것으로도 성이 안차서 세계의 기라성같은 무도가들을 찾아가서 실전대결을 벌여서 200200승이라는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승률을 기록한 일본무도계의 최고의 파이터라는 명성을 갖고있는 인물이다.

 

최영의

 

그런데 이렇게 1950년대 당시 한사람은 프로레슬링계에서 최고의 영웅으로, 또다른 사람은 실전무술가로서 최고의 경지에 오른 영웅으로 양대산맥을 이루고 있던 두사람이, 1954년도에 치러진 한 프로레슬링 경기로 인해서 완전 적대관계로 돌아서고 만다.

 

역도산 대 기무라의 경기 대결

 

1953년도에 일본에 프로레슬링을 도입한 역도산이 프로레슬링의 흥미를 배가시킬 수 있는 테그매치를 도입하게 되는데, 자신과 함께 한조를 이루어서 싸울 태그파트너로 일본유도의 살아있는 전설 기무라 마사히코를 스카웃하게 된다.

 

기무라는 당시 일본유도계의 최고의 실력자로 명성이 높았던 인물로 국제유도대회에 출전해서 왠만한 상대선수들은 업어치기 한판으로 승부를 결정짓는 한판승부의 실력자였다.

이렇게 일본의 두영웅이 한조를 이루어서 태그팀으로 미국선수들을 함께 물리치면서 활동하다가 일본 프로레슬링의 흥행을 위해서 새로운 이벤트를 마련하게 된다. 그것은 일본의 두영웅 즉, 역도산과 기무라가 일대일 한판승부를 펼치자는 것이었다.

 

 

이 두사람의 경기시나리오는 50년대 전반 일본에 프로레슬링이 처음 도입된지 얼마 안되는 시점에서 프로레슬링의 인기와 붐을 높여보려는 흥행의 목적으로 기획된 시나리오였다.

일본의 최고의 유도선수와 최고의 레슬링선수가 맞붙는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빅이벤트였으며 이것은 일본프로레슬링의 완전한 정착을 위해서 어찌보면 불가피한 선택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결국 1954년 역도산 VS 기무라의 헤비급경기가 전격 치러지게 되었다. 그런데 이 두사람의 경기는 사전에 각본이 미리 짜여져 있었으며 각본상 처음경기는 무승부로 하고 다음 두경기는 서로 11패씩 나눠갖게 되는 경기였고 두사람의 경기내용도 각본에 따라서 움직이게 되어 있었다고 한다.

 

유도귀신 기무라

 

역도산과 기무라, 두사람 모두 일본에서 최고의 영웅대접을 받고있는 거물급인사들이라 실전을 피하고 서로의 체면을 유지하는 선에서 적당히 재미있게 각본대로 경기를 치르도록 사전에 합의가 이뤄진 경기였다.

 

그런데 1954년 역도산 대 기무라의 역사적인 프로레슬링 경기가 열리고 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엄청난 이변이 일어났다.

역도산 대 기무라의 경기는 역도산의 일방적인 난타 끝에 역도산의 일방적인 KO승으로 끝이 났으며 경기에 패한 기무라는 완전 떡실신되어서 들것에 실려나가고야 말았다.

 

역도산은 서로 무승부로 하기로 각본을 짠 경기를 왜 합의를 어기고 기무라를 두들겨패서 완전 박살냈던 것일까역도산이 기무라를 완전 박살낸 데에는 그만의 이유가 있었다고 한다

 

역도산이 나중에 주변사람들에게 한 이야기를 빌리자면 1회전이 시작되고 난 이후 자신은 약속대로 기무라와 대등한 경기를 펼쳤었는데 갑자기 기무라가 발로 자신의 급소를 가격했다고 한다

기습적으로 급소를 맞고난 역도산은 정신이 번쩍 들면서 기무라측에서 먼저 약속을 깼기 때문에 자신도 각본을 무시하고 실전으로 겨루게 되었다고 해명한 바가 있다.

 

경기도중 기무라가 역도산의 하복부를 발로 찬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은 기무라가 약속을 깼다기 보다는 실수를 한 것으로 보이며, 역도산은 기무라의 도발에 과잉대응으로 맞서서 자신의 실력대로 실전대결로 몰고간 것이다.

역도산과 기무라의 경기동영상을 한번 살펴보면 일본 유도계를 석권했다고 하는 최고의 유도실력자가 역도산에게 그야말로 샌드백처럼 얻어맞는 장면이 나온다.

 

 

역도산은 거의 무방비상태의 기무라를 개패듯이 패버렸으며 심지어는 무참히 얻어맞아 코너에 주저앉아있는 기무라에게 발로 얼굴을 차는 등 처참하게 기무라를 깨버리고 있었다.

레슬링이 아니라 지금의 종합격투기를 하는 것처럼 역도산은 기무라를 매우 난폭하고 광폭하게 기무라를 두들겨팼던 것이다.

 

기무라의 입장에서는 서로 합의를 했기 때문에 각본대로 움직이고 있었으므로 최영의에 대한 경계를 완전 푼 상태에서 갑자기 상대방의 예상치못한 집중 공격을 받게되니까 전혀 무방비상태에서 얻어맞게된 것이며 거의 대항도 못하고 완전 박살나고 말았다.

사람이 긴장감과 경계심을 갖고 싸우는 것과 긴장을 완전 풀고 싸우는 것에는 큰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역도산 vs 기무라 경기동영상

 

 

 

 

 

 

 

최배달 대결, 황소싸움 동영상

 

 

 

한때는 자신의 태그팀 파트너이기도 했던 기무라를 역도산은 왜 이처럼 처참하게 패대기쳐버린 것일까? 최배달이 기무라를 이처럼 각본을 어기고 무참히 깨버린 것은 두가지 이유에서 라고 판단할 수 있다.

 

하나는 그 당시 자신과 태그팀을 구성하고 있던 기무라는 태그경기에서 항상 역도산의 그림자역할에 머무르고 있었으며 자신은 항상 상대선수에게 얻어맞는 역할을 하고 역도산은 그런 위기에 빠진 기무라를 구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었기에 자신은 역도산을 빛나게해주는 조연역할에만 그쳐야만 했다.

 

태그팀경기에서 역도산의 명성을 높여주는 들러리역할만 해왔던 기무라는 역도산과의 태그팀구성에 불만을 품게 되었고, 결국 기무라는 역도산과 결별하였고 자신만의 프로레슬링단체를 만들어서 활동하게 된다.

 

이러한 기무라의 새로운 프로래슬링단체 설립은 역도산으로서는 가만히 두고만 볼 수 없는 일이었다. 자신이 그동안 피땀 흘려 쌓아놓은 일본프로레슬링계를 잠식해 들어오는 기무라에게 본 때를 보여주어서 사전에 그 기세를 완전히 꺾어놓을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 유아독존의 마인드가 상당히 강했던 역도산은 미래의 강력한 라이벌로 등장하게 될 기무라와 그의 레슬링단체를 사전에 예봉을 꺾어놓아서 자신의 레슬링단체를 반석위에 올려놓으려는 시도였다고 풀이할 수 있다.

 

 

역도산은 아집이 무척 강한 사람이며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으로서 자존심도 무척 강한 사람이다. 그런 역도산에게 자신이 한 수 가르쳐주었던 기무라의 이같은 움직임은 자신의 아성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인 것이고 경기를 통해서 본 때를 단단히 보여준 것이다.

 

그런데 이 역도산과 가무라의 경기는 또다른 갈등을 양산시키고 있었다.

이 역도산과 기무라의 경기로 인해서 역도산과 최배달을 서로 완전 적대관계로 돌아서버리고 급기야 최배달은 역도산에게 도전장까지 내밀게 된 것이다.

 

최배달과 역도산은 1950년대 전반까지만 해도 서로 같은 조선인출신으로서 동지애를 갖고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역도산이 기무라를 개패듯이 패는 경기가 벌어졌고 이로 인해 기무라와 친분관계에 있었던 최배달의 반감을 불러오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후 역도산과 최배달을 돌이킬 수 없는 적대관계로 변하게 된다.

 

 

 

역도산 대 최배달의 대결

 

역도산이 기무라전에서 각본을 무시하고 무차별 난타를 퍼부어서 KO승을 거둔 사건은 비록 그것이 사전 약속을 깨버린 것이라고는 하지만, 법적으로는 문제될 것이 하나도 없는 경기였으며 일본팬들 입장에서는 각본에 의한 가 아니라 실전의 경기를 보여주었으므로 오히려 환영할 만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최배달

 

물론 도덕적으로는 비난 받을 소지는 있지만, ‘를 싫어하는 일반 대중들에게는 가 아닌 진정한 경기를 보여주었으니, 오히려 정당한 경기라고 평가할 수도 있는 사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경기를 링사이드에서 관람하고 있었던 최영의(최배달)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형제처럼 두터운 유대관계를 맺고있던 기무라가 마치 개처럼 얻어맞는 장면을 보고서는 눈에서 불이 번쩍 났던 것이다.

 

최영의와 기무라는 서로 무술훈련을 함께 할 정도로 절친한 사이였으며 서로 존경과 우정을 나누던 그런 관계였다.

당시 최배달은 가라데의 최고의 경지에까지 도달한 상태에서 또다른 무술의 융합의 필요성을 느꼈고 그래서 당시 일본의 유도계의 달인인 가무라에게 유도를 별도로 배웠던 것이다.

 

가라데 뿐만 아니라 종합무도가를 꿈꾸고 있었던 최배달에게 기무라는 유도를 흔쾌히 가려쳐주며 두사람은 급속도로 가까워졌고 서로 몇 달 동안 함께 합숙하면서 무술훈련을 함께 하기도 하며 서로의 집을 오가면서 돈독한 우정을 쌓아갔던 사이였다.

 

그런데 이렇게 돈독한 관계의 기무라가, 일본 유도계의 최고실력자인 기무라가 역도산에게 손한번 써보지도 못하고 개처럼 얻어맞는 장면을 곁에서 지켜봤던 최배달의 눈에선 불이 번쩍 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또한 최배달(최영의)은 역도산과 가무라의 경기의 숨겨진 내막을 모두 알고 있었으므로 약속을 깨고 기습적으로 무방비상태의 기무라를 무참히도 두들겨팬 역도산을 매우 비겁한 사나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최영의의 입장에서는 사람과의 신뢰보다는 오직 자신만의 명예와 욕심만을 추구하는 역도산을 비인격적인 사람으로 보였던 것이다그래서 최영의는 비겁하게도 꽁수를 써서 기무라를 무참치 깨버린 역도산에게 복수를 하겠다고 도전하게 된다.

 

그러나 또다른 이면에는 최영의(최배달) 또한 항상 자신이 최고의 무도가라는 것을 확인하고 싶어하는 무도가로서 자신 만큼 강하다고 판단되는 상대방을 꺽지않으면 직성이 풀리지않은 사람으로서, 최고의 레슬러로서 하늘 높은줄 모르고 명성을 드높이고 있는 역도산을 꺾음으로써 자신이 최고의 무도가라는 사실을 다시한번 증명하고자 하는 의도도 같고 있었다고 풀이할 수 있다.

 

그래서 최영의는 역도산에게 도전할 기회를 찾고있었다. 최영의는 역도산이 자주 다니는 동경 나이트클럽을 종종 찾아가서 역도산을 기다리는 것이 하루의 일과가 되었다.

 

드디어 역도산이 그 나이트클럽에 나타났는데 역도산은 혼자가 아니었고 자신의 제자들과 보디가드를 대동하고 나타났던 것이다. 제아무리 최영의 라고 해도 역도산 한사람도 상대하기가 쉽지않은 데, 몸무게 200kg이 훨씬 넘는 레슬러들을 5~7명 대동하고 나선 역도산일행을 혼자서 상대하기에는 무리였다.

 

 

최배달은 역도산과 일대일 대결을 펼쳐서 누가 더 강한지를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최배달은 계속해서 그 나이트클럽에 들러서 역도산을 기다리곤 하였는데 드디어 기회가 찾아왔으며 한달여 만에 역도산 혼자서 나이트클럽에 들어온 것이다.

 

왠일인지 혼자서 나이트클럽에 찾아온 역도산은 사회자의 부탁으로 나이트클럽 무대로 올라서 손님들에게 인사를 나누는 순간 최영의가 불쑥 무대위로 올라가 역도산에게 도전장을 내민 것이다.

최영의는 많은 사람들이 보는 자리에서 역도산과 한판 겨루고 싶었던 것이고 그렇게 함으로써 역도산이 자신의 도전을 회피하지 못하도록 하려는 의도와 함께 많은 사람들로부터 자신이 역도산을 꺾었다는 사실을 공증받고 싶었던 것이다.

 

최배달이 무대위로 올라서 역도산에게 한판 대결을 벌이자고 도전하자 전혀 예상치못한 행동이 역도산으로부터 나왔다고 한다역도산이 무대 마이크 쇠파이프를 무기삼아 들고 최배달을 겨누었던 것이다.

 

이런 역도산의 의외의 행동은 최배달의 예상을 완전 뒤짚어버린 것으로서 최배달은 역도산이 정정당당히 맨손으로 대결에 응하리라고 예상했는데 마이크 쇠파이트를 들고 자신을 겨누는 것은 매우 비겁한 행동으로 본 것이다.

 

쇠파이프를 든 채, 땀을 뻘뻘 흘리면서 자신을 노려보는 역도산에게서 패배와 두려움에 괴로워하는 한 나약한 인간의 모습을 느낀 최배달은 역도산에 위선으로 가득찬 비겁자라는 말 한마디를 건네고 최영의는 그 자리를 떠나갔다고 한다.

 

이로써 일본가라데의 최고실력자 최배달과 일본프로레슬링의 영웅 역도산의 역사적인 대결을 불발로 그치고 말았다.

필자가 생각해보아도 역도산이 자신에게 혼자서 도전장을 내민 최배달에게 쇠파이프를 들고 응수했다는 것은 그의 명성에 걸맞지 않는 행동이며 좀 비겁한 행동으로 보인다.

 

사나이라면 상대방이 비무장상태에서 혼자서 도전할 경우 맨손으로 응대하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하는데, 더군다나 일본프로레슬링계의 최고 선수권자라는 사람이 그러한 행동을 한다는 것은 비겁하고 나약한 행동으로 보인다. 어쩌면 당시 역도산이 술에 많이 취해서 객기를 부렸을 수도 있다고 본다.

 

 

어쩌면, 역도산은 평소에 최영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최배달은 그당시 세계 곳곳을 누비면서 기라성 같은 무도가들에게 도전해서 연전연승을 거두고 있던 상황이었으며

또한 최배달은 미국에도 진출해서 미국 프로레슬러들도 수없이 쓰러뜨리고 있었으니,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있었던 역도산은 무기를 사용해서라도 최배달의 도전을 최대한 저지해보려고 의도했던 것은 아닐까?

 

아뭏튼 최영의와 역도산의 역사적인 대결은 역도산의 비겁한 행동으로 인해서 불발로 그치고 말았다.

최영의는 자신이 세계최고의 파이터라는 사실을 증명하고자 시도했던 막강한 상대와의 대결을 놓치게 되어 매우 실망했었다고 한다. 아니 비겁한 행동을 한 역도산에게 매우 실망했었다고 한다.

 

 

최배달 대 김일

 

 

 

그런데 이러한 역도산과의 대결은 나중에 역도산의 수제자였던 김일이 최배달에게 도전하겠다는 의사를 피력하여 또다른 반전이 이뤄지게 된다.

 

1963년 역도산이 야쿠자에게 피습당해서 사망하고 난 후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최영의가 과거에 역도산이 자신에게 마이크 쇠파이프를 들고 자신에게 대항한 사실을 기자들에게 언급했다고 한다.

 

이러한 최영의의 발언은 역도산 제자들에게는 스승을 모욕하고 비하하는 발언으로 받아들이게 되었고, 이 발언을 전해들은 역도산제자 김일은 스승을 모욕했다고 말하면서 최영의에게 도전하겠다고 발언했다고 한다.

 

김일의 도전하겠다고 발언을 전해들은 최영의는 자신의 역도산 발언에 오해가 있었다고 해명했으며, 자신도 사실은 역도산을 좋아했으며 역도산을 모욕할 의사는 전혀 없었다고 말하고는, 굳이 김일이 자신에게 도전하겠다면 대결을 피하지 않겠다는 말로 응대하였다고 한다.

 

이때에는 최영의가 역도산에게 도전했던 때로부터 10년이 지난 뒤에 일어난 일로서 당시 최영의의 나이가 41세로 불혹의 나이에 접어들었고 더 이상 최배달은 실전파이터 행보를 하지않고 일선에서 물러난 시기였다.

또한 김일은 당시 한국으로 진출해서 한국프로레슬링을 정착시키고 있는 등 바쁜 시기를 보내고 있었으므로 두사람의 대결을 성사되지 못하고 흐지부지되어 버리고 말았다. 

 

 

역도산의 사망이유

 

역도산은 전성기를 누리고있던 1963128일 동경의 한 나이트클럽 화장실에서 일본 야쿠자출신 무라타 가쓰시가 휘두른 칼에 복부를 찔리고 병원으로 후송되었다가 복막염으로 사망하고 만다.

 

 

역도산을 칼로 찌른 무라타 가쓰시는 야쿠자집단인 스미요시 가이의 단원이라고 하는데, 우연히 화장실에 들른 역도산과 무라타간에 사소한 말다툼으로 시비가 붙었고 역도산에게 몇 대 얻어맞은 무라타가 칼을 꺼내어 역도산의 복부를 찔렀다고 한다.

 

역도산의 죽음은 정말 의문투성이라고 할 수 있다. 역도산이 칼에 복부를 찔진 시점은 128일인데 역도산이 복막염으로 사망한 시점은 일주일이 지난 1215일로서 더군다나 병세가 호전되다가 갑자기 사망했다는 점이 큰 의문점으로 남아있다.

 

역도산이 일본 야쿠자패거리의 한 똘마니의 칼에 맞아 사망했는데 그 과정에서 많은 미스터리가 남아있으며 50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의문점은 풀리지 않고 있다.

 

당시 역도산의 부인인 다니카 게이코는 역도산의 죽음이 의료사고 때문이라고 주장했지만 의료사고를 입증하는 부검결과가 전혀 공개되지 않아서 여전히 의문점만 키우고 있는 꼴이다.

 

역도산이 야쿠자집단인 스미요시 가이의 조직원 무라타의 칼에 찔린 후 곧바로 병원으로 이송되어 수술을 받았는데 그당시 역도산의 상처는 2주 치료를 요하는 매우 경미한 상처였다고 한다.

첫 번째 수술을 성공적으로 진행되었다고 하며 역도산은 수술후 회복세로 돌아섰으며 몸상태도 좋아졌으며 관계자들과 병실에서 프로레슬링 흥행을 위한 대책회의까지 가졌다고 한다.

 

그런데 며칠 후에 역도산은 갑자기 병세가 악화되었다고 하며 152차수술을 했으며 수술이 잘 되었다고 말하는 의사의 말과 달리 역도산은 수술후 곧바로 사망하고 말았다.

병원측이 밝힌 역도산의 사망원인은 화농상 복막염으로 칼에 찔려 소장에 상처를 입혔다고 하며 수술 후에 부작용이 생겨서 사망했다고 한다첫 번째 수술을 회복되던 중이었는데 갑자기 병세가 악화되어 재수술을 하였는데 수술 후 돌연 사망하였다는 것이다.

 

 

역도산의 죽음은 납득하기 어려운 미스테리한 부분이 많다.

첫 번째 수술후 의사가 금지한 탄산음료를 역도산이 마셨다고 한다. 이 탄산음료가 회복중이던 역도산이 복막염을 일으키는 집적적인 원인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이 말도 설득력이 약하다.

 

단지 탄산음료 한잔 마셨다고 회복기에 접어든 사람이 갑자기 악화되어 죽는다는 것은 매우 설득력이 약하다고 본다.

 

또한 산노병원에서 역도산에게 보통사람의 2배 가량의 마취제를 투여했다고 하는데 이점도 매우 미스터리한 부분이다.

역도산의 체격이 보통사람보다 크다고 하더라도 2배 이상의 마취약을 투여한다는 것은 매우 위험천만한 일이며 산노병원측에서 이같은 위험성을 모를 리가 없다고 본다.

 

여기에서 음모론이 나오고 있다. , 역도산 사망은 일본 우익정치인들, 그리고 야쿠자가 연루된 음모에 의해서 역도산이 사망했다는 얘기다.

역도산을 칼로 찔렀던 무라타는 일본 야쿠자집단의 양대산맥 중 하나인 스미요시 가이소속이다.

 

그가 우연히 사소한 시비로 인해 일본의 영웅인 역도산의 살해를 시도했다고 보기에는 너무 사건이 크고 중대하다. 혹시 무라타가 그가 속한 야쿠자집단 스미요시 가이의 명령에 의해서 역도산을 공격한 것은 아닌가?

 

 

처음에는 무관심했던 역도산이 1960년에 들어서면서 민족문제와 남북문제에 커다란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고 한다.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고향이 평안남도인 역도산은 남한을 방문한 후 휴전선에 들러서 눈물을 한없이 흘렸다고 한다.

 

역도산은 자신이 세계적인 프로레슬러로서 위치가 확고해지고 큰 돈을 벌게되자 서서히 자신의 고국과 남북한의 화제문제로 관심을 옮겨가고 있었다또한 역도산은 60년대 이후 한국을 극비리에 방문하는 등 한국과 북한에 대한 행보가 눈에 띄게 늘어났다고 한다.

그당시 역도산은 남북한 공동으로 프로레슬링대회를 서울과 평양에서 개최하려는 계획까지 세워두고 있었다고 한다.

 

1963년 사망하기 몇 달 전에는 남한을 방문해서 서울에 대형 체육관을 설립을 지원하기로 결정했으며 도쿄올림픽에 출전하는 북한선수단의 경비를 지원하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외부적으로는 표시를 내지는 않았지만 역도산은 이렇게 남한과 북한을 오고가면서 남북한 화해와 민족문제에 큰 관심을 갖고 지원을 늘려가고 있었고 지인들의 말을 종합해보면, 역도산은 남북한 통일을 갈망하는 민족주의자로서 변신해가고 있음을 그의 여러 행보에서 엿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일본의 영원한 영웅이기를 바랬던 역도산의 이러한 민족주의적 경향은 일본우익의 입장에서 볼 때에는 매우 위험천만한 행보로 보일 수 있다는 것이다.

당시 일본에서 대중적인 인기가 엄청 높았던 역도산이 한국인이라는 사실이 밝혀지고 민족주의자라는 사실이 드러나면 일본으로서는 자존심에 커다란 상처를 입을 수 있다.

 

또한 역도산이 추진하는 남북화해와 통일이 탄력을 받으면 남북의 영원한 분단을 바라는 일본으로서는 정치적으로 큰 난관에 봉착하게 된다.

그당시까지만 해도 일본사람들은 역도산을 일본인으로 인식하고 있었는데, 일본민족의 영웅인 줄 알았던 그가 사실 한국인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 또한 남북통일을 추진하는 민족주의자라는 사실이 밝혀지면 일본의 자존심과 자부심은 여지없이 무너지고 만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일본의 우익정치인들과 그들과 결탁한 야쿠자집단이 더 이상 위험천만한 세력으로 성장한 역도산을 제거하려고 음모를 꾸민 것이 아니었을까 하고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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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프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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